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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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9)-뉴욕 중앙역의 구두닦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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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공원 밖으로 나오자 동남쪽 모서리에 광장이 하나 있는데, 남북전쟁의 영웅 셔먼 장군이 종려수 가지를 든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인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가는 금빛 조각상이 보인다. 데모의 광기에 시달리고 있는 뉴욕 시가지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이. 어쩌면 뉴욕시는 니케 여신이 늘 동행해주는 승리의 도시인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파크애비뉴 E. 42번가에 있는 뉴욕 그랜드중앙역까지 걸어 내려가 기차역 건너편에 서서 그 터미널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뉴욕에 헤르메스가 산다’를 쓴 우리들의 친구 작가가 뉴욕에 가면 꼭 가볼만한 상징물을 몇 개 알려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뉴욕 42번가에 있는 이 기차역 ‘New York Grand Central Terminal’의 조각상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이 기차정거장 꼭대기엔 큰 시계탑이 있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행자, 목동, 상업의 신이며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가 인간세상의 시간을 지배하려는 듯 맨발로 시계를 꽉 밟고 서 있다. 투구같이 생긴 페타소스 모자를 쓰고 하늘을 날듯 큰 날개를 펴고 뱀을 감아 올린 전령의 홀을 짚고 서서 오른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발치엔 철길의 방향을 정해주는 한 일꾼이 철로를 이어주는 연장을 들고 ‘어느 정거장으로 갈깝쇼?’ 명령만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고. 헤르메스 왼편 발치엔 아름다운 여인이 미네르바처럼 시를 쓰며 기대앉아 있다. 여행은 고달프지만 즐거움과 낭만의 시가 흘러나온다는 듯. 때로는 퉁소 가락과 시계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열차 시간표를 짜기도 하리라.

 

네덜란드의 빌트지방에서 이민 온 코넬리우스 밴더빌트(Van der Bilt)라는 철도사업가가 이 거대한 기차터미널을 지었다고 해서 정거장 안엔 밴더빌트 홀과 식당과 미술관이 있다. 그는 테네시주에 밴더빌트대학을 세워 많은 인재를 키우기도 했다. 밴더빌트 홀 앞에 있는 터미널의 천장은 짙푸른 밤하늘에 별들을 수놓은 듯, 조개탄 그을음과 담배연기에 그슬린 기차정거장을 재현하려고 안개 피우듯 분광 처리를 해서 별빛이 묻어날 듯 반짝이고 있었다. 

 식당 천장에도 우주선 같은 타원형의 등불이 휘황한데 대낮부터 맥주와 포도주를 마시는 손님들로 붐비고 있다. 우리는 멋진 유리나팔 컵에 담긴 흑맥주와 남편이 밖에서 사온 햄버거로 간단한 점심을 먹으면서도 큰 손님 행세를 했다.

 식당에서 나오자 밴더빌트 미술관이 아름다운 유리조각 작품을 문앞에 전시하고 우리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한다. 나는 미술관에 들어가 주로 상업용 조각작품이지만 그 기원을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남편이 갑자기 보이질 않는다. 함께 걸어가다가 혼자 잘 빠져나가는 그이지만, 이 뉴욕 대도시에서 헤어지면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는데, 난감하고 화가 나서 둘러보니까 한 쪽 구석에서 “여보!” 하고 부른다.

 그는 어느 사이 혼자서 식후칠완보(食後七緩步)로 식당 건너편 구석에 놓인 구두닦이의 높은 가죽의자 위에 올라 앉아있는 거였다. 아까운 시간에 웬 구두를 닦는다고 야단이람, 하면서 가보았다. 

 

한 중년의 남자가 동생 부부와 동업을 하는 구두닦이 가족이었다. 널찍한 가죽의자에 편하게 앉아 중년의 구두닦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남편 옆에 가까이 다가서자 휘발유 냄새가 향긋하게 났다. 옛날에 서울역 앞에서 “구두 딱세!” 하면서 쫓아다니던 어린 소년들이 생각났다. 서울역 부근과 명동 근처 다방을 돌며 구두를 찍어오는 ‘찍새’ 신분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는 ‘딱새’가 되어야 돈을 벌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의 대도시 뉴욕 기차 정거장에서 만난 에콰도르에서 이민 온 이 구두닦이 가족들은 처음부터 돈을 내고 영토확보한 ‘딱새’ 가족이었다. 어둡고 피곤해 보이는 필이라는 중년남자는 이미 남편의 한 쪽 구두 위에 약을 잔뜩 묻혀놓고 있다. 약이 말라가자 그 위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더니 헝겊으로 살살 돌려가며 문지른다. 

뿌연 잿빛이던 남편의 구두가 새까맣게 빛을 내고 있었다. 서울의 구두닦이 소년들은 구두 위에 침을 퉤퉤 뱉으며 광을 내곤 했지. 그 때보다 더 반짝이는 구두에 헤르메스의 날개라도 돋친 듯 사뿐하게 내려오는 남편에게 필은 4불만 내란다. 팁도 안 받는다. 저렇게 조금 받아 언제 돈을 버나 걱정스럽다.

 화려하고 밝은 이 터미널, 아래위층으로 백 군데가 넘는 플랫폼과 선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인생의 종점 같은 이 터미널 지하에 비밀 트랙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 전에야 발견되었다. 

지하의 61번 선로 위에 대통령 전용인 방탄 기차가 아직도 선로 위에 있다는 정보를 추적한 NBC 맷 로어(Matt Lauer)가 2008년에 조사팀을 만들어 드디어 찾아낸 것. 1930년 당시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위해 특별 제작한 기차가 그곳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누구와 무슨 비밀회담이 오갔나하는 세밀한 정보도 곧 알게 되리라.

 

구약시대에 야곱이 베델에서 잠을 자던 돌베개를 믿음의 경계표지로 세운 이래로, 그리스에선 헤르메스가 ‘표지석 더미’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전령이 된 야곱처럼 제우스신의 전령 노릇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장소 혹은 사후의 세계로 건너가는 영혼의 길잡이도 해주는 신이었던 헤르메스가 이제 뉴욕시 기차 중앙역에서 사람들의 갈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이 웅장한 뉴욕중앙역은 우리나라의 서울역 청사를 생각나게 한다. 이젠 문화재가 된 서울역사(驛舍)도 규모만 작을 뿐, 하얀 돌과 붉은 벽돌로 장식한 아름다운 건물에 누구나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신혼여행 가는 이들의 첫 관문이었고, 서울역 그릴에선 50년대 전후로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많은 작품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서울역사 건설 때의 기획대로 만주-북경-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놓고 모스크바-베를린까지 연결될 날이 오리라 희망을 가져본다.

 일주일 후에 집에 돌아왔더니, 외손녀 에스더가 ‘Grand Central Terminal’을 무대로 만든 영화 ‘Arthur(아더왕이 아닌 망나니 청년 아더가 그의 인생 길잡이였던 유모를 잃고 무모한 인생모험을 하는 이야기)’와 수퍼맨 DVD시리즈를 빌려 주어 다시 한번 그 미로같은 뉴욕중앙역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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