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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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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5)-아빌라성의 성녀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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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여정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게 마련이다. 부모나 형제자매와 함께, 배우자 혹은 정다운 벗과 함께. 그 동반자들은 거의가 나를 이롭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그중에도 우리를 가장 기쁘게 해주는 영적 여정의 동반자는 기도할 때마다 옆에서 들어주시는 우리 주님.

 

 

16세기 스페인 아빌라의 성녀, 저술가이며, 영성가인 예수의 데레사는 ‘주의기도’ 풀이를 한 그의 책 ‘완덕의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사랑하시는 님과 단둘이 정답게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시간을 갖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기도 없는 인생은 잃어버린 인생이고, 참다운 기도만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길이다.” 

 데레사 성녀의 또 다른 책 ‘영혼의 성’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그 궁성의 문에 드는 것이 곧 기도라고 했다. 나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에서 상징적인 일곱 개의 궁성을 거닐며 데레사의 숨결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신비스런 연못들과 우주의 상징 같은 둥근 벌집천장, 그리고 정원엔 탈레가가 연주하는 기타소리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데레사 성녀(1515~1582)가 태어난 아빌라에서는 ‘영혼의 성’보다 ‘완덕의 길’을 더 생각나게 했다. 우리 부부는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아빌라역에 내렸다. 아빌라 기차역 대합실의 한 벽면엔, 성녀 데레사가 성경을 손에 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온 스페인을 맨발로 걸어다니며 열여덟 군데에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하는 모습을 주황빛으로 그려 놓았다. 아빌라가 데레사의 영성운동의 시원지임을 알려주는 듯이.

 중세기의 로마가톨릭교회가 타락과 부패의 길로 치닫자, 그 잘못을 뉘우치고 초대교회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 박는 사건을 위시해서 츠빙글리, 장 칼뱅, 존 녹스 등의 종교개혁이 유럽 일대에 불붙는다. 그들의 개혁사상은, ‘다섯 가지 오직(Five Solas)’으로 요약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Sola Fide)/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 

 

 

이 모든 운동은 ‘오직 회개’를 전제했기에 가능했으리라. 반개혁주의에 앞장선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예수회를 창설하여 타락하는 교회와 사회를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회복하는 영성훈련(Spiritual Exercise)운동을 펼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맨발의 여성 수도원’을 성공적으로 끌어온 ‘아빌라의 예수의 데레사’는 ‘영혼의 벗, 십자가의 요한’과 협력하여 개혁가르멜의 맨발가르멜수도원을 세우고 이끌어간다. 예수의 데레사는 교회에서 기도 중에 예수님이 당하는 십자가상의 고통을 보고 뜨거운 감동으로 자신의 냉담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관상의 기도’로 침묵과 고독 속에 묵상함으로써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고 영성이 새로워짐을 체험한다.

 ‘치마 두른 어거스틴’이란 말을 듣기도 하는 예수의 데레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치열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사랑하는 님에 대한 열망으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탈혼의 경지에 이르렀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데레사는, “그때까지 내 생활은 내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의 내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고백한다. 

또한 ‘사랑이 없이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한 사랑을 갖게 됐다. 

 

 

그녀는 밖으로는 가르멜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안으로는 수도원의 수녀들을 기도로 훈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남성처럼 용감하면서도 미모였던 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단벌 초상화를 너무나 밉게 그린 후안에게, “후안 수사님, 주께 용서를 빌어야겠습니다. 나를 그린다고 미운 눈곱쟁이를 그려 놓았으니”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겸손, 겸손, 또 겸손!”을 가르치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개혁가르멜수도회’로 인한 박해에 저항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성녀 데레사는 고행과 희생을 감수했다.

1582년 67세에 중병이 들자, “20년 만에 평안히 누워본다”고 말하고, 사모하던 님과 영혼이 일치하는 기쁜 순간에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고 말하면서 토르메스강이 보이는 암자에서 선종한다. 

40년 후에 성녀로 시성되고, 400년이 지난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여성 최초의 교회박사 칭호를 받는다. 이렇게 성녀 데레사는 정치, 사회, 종교의 큰 변동과 갈등 속에 파란의 일생을 살았다. 

 아직도 로마 시대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빌라성에 들어서니 성녀 데레사의 뜨거운 사랑의 신비가 전해지는 듯한 감동이 일었다. 따라갈 수는 없어도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데레사 성녀의 집,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은 예수의 데레사가 아직도 관상의 기도에 머물러 있는 듯 조용하다. 

 맨발의 데레사가 지팡이를 짚고 스페인 선교에 나서는 조각상 위의 종각엔 까치가 성녀를 전송하는 듯 둥지를 틀고 앉아있다. 바르셀로나와 몽세라에서 만난 그 많은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만 바르셀로나의 카트리나수도원에서 온 수녀님들만 수학여행온 여학생들처럼 명랑하게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영어도 안 통했지만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은 기쁨이었다.

 

 

성녀가 쓰던 일상집기가 있는 미술관에서 평생의 동역자였던 십자가의 성요한과 나란히 걸려있는 그녀의 단벌초상화를 보았으나 그리 밉상은 아니었다. 큰 열쇠가 천국의 문을 암시하며 보존돼 있었고, 십자가의 성요한이 이곳의 고해신부일 때 쓰던 유치원 의자같이 조그만 의자가 유리장 속에 갇혀 있었다. 후안 파비오 2세가 성요한에게 보낸 편지와 큰 금빛 성배가 바로 어제 도착한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뒤뜰 마당엔 I에서 VII까지 부호 같은 숫자를 적은 네모 난 일곱 개의 대리석이 원을 그리며 중앙을 향해 나가는 듯 박혀 있다. 일곱 번째 돌 앞엔 십자가상과 작은 제단이 놓여 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쓴 자전소설 ‘칠층산’의 십자가에 이르는 고통을 표현한 걸까? 몹시 궁금해서 관장수녀님에게 물어보려고 교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뜻밖에도 그 수녀님은 조용한 교회 제단 앞에 앉아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홀로 기도를 하고 있어서 물어보지 못하고 나왔다. 그 숫자는 데레사 성녀가 ‘영혼의 성’에서 겪은 ‘일곱 개의 궁방’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성 밖엔 장난감 같은 관광열차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데보다 관광객이 적어서 이 버스를 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우리가 엔카르나시온 수도원에서 성녀 예수의 데레사를 만나고 나올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으니까.

 우리는 아빌라 성내로 들어가 아빌라 대성당 에케호모의 석조 아치를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교회미술관에선 동양화가 같아서 우리가 좋아하는 엘 그레코의 친숙한 성화들을 보았고. 톨리도에 가면 그의 또 다른 그림들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교회 골목 모퉁이에 있는 아담한 식당에 들어갔다. 뿔뽀(문어)와 포도주를 시켰는데, 우리가 좋아하는 올리브 한 접시가 덤으로 나와 예수의 데레사님이 주는 선물인 양 기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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