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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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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명의전화 자선만찬회에 참여한 해위 윤보선과 도원 서영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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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궁의 옛날옛적 이야기(25)

무어인의 유산이 묻힌 칠층탑 이야기(9.끝)

                                                    워싱턴 어빙 지음 / Yunice 윤경남 옮김 & 사진

 

(지난 호에 이어)

두 사람은 사건현장 근처에서 오래 서성거리지 않았고, 힘겹게 행운을 가져다 준 보물을 사이 좋게 나누어 가졌어요. 그런 다음 무어인은 그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탕헤르로, 가예고 식구들과 당나귀는 포르투갈로 갔답니다.

 

페레힐은 아내의 충고대로 아주 고귀한 인물로 변신해서 이름도 돈 페드로 힐이라고 격조있게 붙이고요. 작은 키와 안짱다리를 물려받은 그의 자식들은 명랑한 성격에 유복하게 잘 자라고요. 힐여사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이스와 술이 달린 긴 옷을 입고, 손가락마다 반짝이는 반지를 끼고 다님으로서 천박하고 화려한 치장을 유행시켰답니다.

 

읍장과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오늘날까지 마법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저 높은 칠층탑 아래 갇혀있지요. 히스파니아 안에서 하챦은 이발사나, 욕심 사나운 형리나, 부패한 읍장나리가 필요한 날이 또 온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걸린 마법은 최후의 심판 날까지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군요.

 


▲지하로 내려가는 7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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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명의전화 자선만찬회에 참여한 해위 윤보선과 도원 서영훈 이야기

 

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present comes from heaven; it comes down from God, the Creator of the heavenly lights, who does not change or cause darkness by turning.-James 1:17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1982년 한국생명의전화 자선만찬회. 만찬회에 출연(出捐)해준 해위 부부와 그날의 연사 김수환추기경, 준비위원장인 서영훈 총재(해위 뒤편), 소설가 윤남경-전상근(과기처 실장) 부부, 우측에 민석홍(효성엔지니어링사장) 장로와 윤경남(생명의전화 이사) 부부

 

생명의전화(LIFE LINE)은 1966년 호주에서 시작했다. 앨런 워커(Alan Walker) 목사가 절망에 빠진 한 사람의 전화를 받고 그를 도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 사람이 자살을 선택한 것에 충격을 받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아낸 방법은 전화상담이었다.

 

그는 –도움은 전화처럼 가까운 곳에-라는 주제로,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고 하루 4교대로 24시간 전화상담을 통해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이후 생명의전화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한국에는 1976년 9월에 도입하여 “선한 사마리안”을 실천하는 단체가 되었다.


 한국생명의전화 태동은 창립준비위원들 몇 명이 정기적으로 모인 다락방기도회에 이어, 1976년에 조향록 이사장과 이영민 목사가 많은 기관과 개인의 후원으로 설립했다.

 

생명의 전화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지만 종교를 초월하고, 초교파적인 시민단체이다. 개인이 겪는 고통의 문제, 특히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자살 위기자들을 상담하기 위해 24시간 365일 연중무휴로 전국 18개 도시 19개 센터에서 2천여 명의 훈련 받은 상담봉사자들이 전화 앞에 앉아 상담해주는 시민봉사단체이다.

 

제7대 이기춘 이사장은 취임식에서 <자살>을 <살자>는 운동으로 펼쳐나가자는 실질적인 목표를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세계생명의전화 창시자인 알란 워커 목사님이 쓴 <LIFE LINE>을 <생명의전화>로 번역하여 상담원 교육 교재의 하나가 되었고, 한국생명의전화 창단 이사의 한 사람으로 11년 동안 상담원 봉사를 했다.

 

특히 홍보분과 담당 이사이신 서영훈 총재님과 함께 1982년과 1983년에 자선만찬회 준비를 하던 일이 어제일 같기만 하다.

 

그 당시 준비위원이던 내가 남편 민석홍 장로와 함께 생명의전화 자선만찬회에 서예작품을 내주시도록 해위에게 부탁 드리자, “무슨 유명한 글씨라고…” 하시면서 극구 사양하셨으나 자선만찬회의 정신에 동의하시고, 정치적으로 엄중한 견제와 감시를 받는 가장 힘든 시기인데도 두 번이나 출연(出捐)해 주셨다.

 

첫 해의 서예작품으로 <天長地久>천장지구를, 두 번째 자선만찬회엔 <淸泉洗心>청천세심을. 두 작품 모두 소장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이 나서게 되어, 예상보다 큰 후원금이 들어와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날 주제강연을 해주신 김수환 추기경의 자애로운 모습도 잊을 수 없고, 사회자인 차인태 준비위원이 사례금을 후원금으로 돌려주신 것도 기억에 새롭다.

 

서영훈 총장님과의 오랜 인연을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처음 알게 된 것은, 1951년경, 해위가 부산에서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하셨을 때이다. 나의 아버지 윤택선 장로님(국회교통체신전문위원)이 적십자사 총재가 된 큰형님께 축하인사 하신 다며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때 양 갈래 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해위의 여비서가 경기여고 교복을 입고 비서직을 수행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서영훈 씨의 부인이 된 어귀선 사모님이었다.

 

서 총장님은 나의 백부인 해위의 그 당시 여비서님과 결혼하셨기에 나에게도 잘 해주셨던 것 같다. 물론, 해위가 젊은 서영훈 적십자사 사무국장을 끝까지 여러 측면에서 발탁하고 추대(推戴)하신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에 역시 적십자사 총재가 되신 서영훈 총재님이 흥사단 이사장직에 계실 때의 일이다. 1998년 4월 3일, 서울 YMCA강당에서 좌옹 윤치호문화사업회 창립기념식을 가졌을 때, 서영훈 이사장님께 축사를 부탁 드렸다. 서 이사장님은, 그분의 독특한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윤 선생이 왜 나한테 부탁하는지 잘 알지요.”쾌히 승낙하고 좌옹 사업회의 앞날을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다음 해 어느 날 내게 전화해주신 일은 역사적인 에피소드로 잘 기록해두었다. 즉, "윤치호 선생님이 쓰신 애국가 친필에 '윤치호 작'이라고 써있는가요?”하고, 물으셨다. 나는 윤치호 친필 애국가 액자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맞습니다”고 했더니, "윤치호 선생님의 인격으로 보아, 친필로 ‘윤치호 작’이라고 쓰셨다면 윤치호 작이 맞습니다. 그런데, 흥사단 사람들이 애국가는 안창호 작이라고 계속 우겨서 미안합니다. 내 생각에도 도산 선생은 한번도 '애국가는 내가 작사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이 없어 걱정이라"고 하셨다. 

 

 생명의전화 제1회, 제2회 자선만찬회를 도와주신 분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들을 다시 보면서, 지난 2017년에 서울에서 <좌옹윤치호평전>출간 시에 서영훈 총재님을 만나 뵈려고 했는데, 이미 그 해 2월, 98세로 별세하신 것에 새삼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 하늘나라에서도 존경하고 가깝게 지내시던 해위를 만나 위기의 우리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시리라.

 

아울러, <하나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원봉사를 펼치고 있는 <생명의 전화운동> 정신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그리고 귀한 후원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리라 믿는다. (海葦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2020년 6월 소식지 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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