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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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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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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

민영환과윤치호, 러시아에가다 (6)

 

 Praise Him Sun and Moon... and Waters above the Heavens!Psalms148-3/Yunice

 


2월 9일. 토요일. 좋은 날씨. 나가사키, 벨록스 호.

 


기다리는 일도 끝날 날이 있나보다.
드디어 제물포로 가는 기선, 벨록스 호가 나타났다. 오후 1시 30분에 친절한 MN가족들과 로호르에게 작별 인사를 하다. 그의 여동생이 내게 아주 예쁜 돈 지갑을 주었다. 그녀가 오색 비단 조각보로 손수 만든 주머니이다.   다른 사람 들과 마찬가지로   왼손으로는 선물을 건네고 오른 손으로 내게 악수를 하며 배웅해주었다. MN과 곤도씨가 기선을 타는 데까지 배웅해주다.


꼭 십 년 전 오후 2시에, 나는 나가사키를 떠나 상해에 닿았다. 그날 밤은 서늘하고 달 빛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밤중의 정적 속에 노 젓는 소리만 구슬프게 뱃전을 때렸지. 정다운 벗들을 멀리하고, 내게 정다웠던 사람들과    황망하게 집을 떠난 나는 비감에 젖어있었지. 나는 울고 말았지.


오늘 나는 아주 착잡하게 내 성격 속에 십 년을 두고 엮어낸 빛과 그늘의 세월을 안고 귀향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미국에, 일본에도 친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애정과 걱정어린 마음으로 내 장래를 주시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필요할 때 친구가 되어주고 내 성실함을 알아주는 영원히 감사해야할 친구들이다. 오 하느님, 주님께서 선한 길로 예비해 주셨음을 감사 하나이다.


승객을 태우려고 만들었다고 볼 수없는 아주 초라한 벨로스 호가 저녁 6시 30분에 닻을 올렸다.
상해 사투리는, 내가 따라하기엔 어렵지만 아주 매력있게 들린다. 내 사랑하는  아내의 언어 이기에.

 

2월12일. 화요일. 좋은 날씨. 조선 제물표.


배가 어제 밤 11경에 제물포에 닿았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춥고 어두어 해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부두에 닿았다.


10년만에 내 모국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날씨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당연히 나는 행복해야 하고 지금 아주 행복하다. 이곳에서는 내가 어디든지, 언제든지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쩐담!  지금 처럼 슬픈적은 또 별로 없었거늘. 조선의 막노동꾼 들은 이상하게 만든 흰 옷에 새까맣게  쪄든 옷을 입고 일하고 있고, 중국에선 아주 지저분해 보이던 집들이  조선의 움막같은 시골 초가집과 비교해 보니 오히려 궁성 같구나. 사방에 쌓여있는 쓰레기 썩는 냄새에, 비참하게 가난하고, 천대 받고 사는  무지한 백성들, 보기 흉하게 벌거벗은 산, 무방비 상태의 조선을 잘 보여주는 이 광경들은 조선 사람의 애국심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하구나. 절망스런  탄식 말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구나.


환영하라! 그리스도인이건 다신교도 이건, 조선의 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 건 열번이라도 환영하자! 주님은 내가 도움을 구하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가톨릭 교회나 영국성공회 선교부는 깨끗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소서! 


타운센드 씨를 방문하다. 십 년전에 내가 그와 헤어졌을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미국인이다. 그의 집에서 점심 대접을 받다. 그가 말하기를, 감자 몇개를 밥상에 올려 놓는 일은 제물포에선 이제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이러한 나라에서 살아 가려면 굉장한 참을성이 필요하단 얘기다.  NCDN의 유명한 주재원에게서 배운 것은, 영국교회의 선교방침이다.


제물포에서 유일하게  명랑해 보이는 것은 일본 여성들과 일본 아이들 뿐이다. 
상해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알렌 부인에게, 본넬 교수와 리쳐드슨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제물포에서 가장 좋은 호텔방엔-아마도 조선 전국 어디서나 마찬가지 겠지만-세 겹으로 된것이 있다. 종이와 먼지와 맷트이다. 고약한 냄새가 온 방 안에 풍기고, 가구는 지린내 나는 쩌든 오줌 자국이 그대로 있고, 더러워진 놋그릇이나 나무 판대기를 담배 재털이로 쓰고 있다. 여섯 조각도 더 되는 나무조각들을 붙여서 만든 못 생긴  목침들…


타운센드씨의 소개로 김교삼을 만나다. 조선 가톨릭 신자인데 한 때 알렌의 시종이었던 사람이다. 아주 착실한 조선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지만, 알렌 박사와 타운센드씨의 전적인 신임을 받을 만큼 신실한 사람이다.

 

2월13일. 수요일. 제물포에서 서울로.


어제 밤에 고베야(神戶屋)에서 마에다(前田) 씨와 한 방에서 자다. 
6시 30분에 일어나다. 오전 9시에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인력거를 타고 가다. 아름다운 날씨이다. 인력거에서 내려 길을 한참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길은 걷기가 아주 나쁘고, 어떤 길은   막 일꾼 중의 한 사람이 문제가 생겨 걸어가야 할때도 있다. 보통 때도 전형적인 건달임을 증명해야만 조선 사람이 된다는듯이 구는, 조선  막 노동꾼 중의 한 사람 때문이다.


강 가에 집에서 보낸 하인이 나와서 나를 마중하다. 서울 집에 오후 4시에 도착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어머님이 건강하셔서 내가 걱정한 것처럼 늙지도 않으셨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몇 분 동안 말 문을 열지 못했다. 다만 서로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말 없는 사랑의 언어를 나눌 뿐이었다. 아버지는 시골 집에 가 계셨다.


어머니는, 작년에 아버지께서 귀양 가는 재판 받으신 이야기와 그 가혹한  과정을 간간히 들려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제발 그만 말씀 하시도록 간청했다.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은 끔찍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에 미국 공사관의 비서관인 호레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그는 나를 한 없이 반기며  진심으로 환대한다. 언더우드 박사와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조정의 전직 관리들의 몰염치한 탐욕에 대해 정보를 주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립병원은 처음부터 장로교 선교부가 책임지고 시작하였으며, 고종께서 연 5천불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셨다는 것. 그런데 그 돈은 한 번도 병원에 들어오지 않았고, 미국공사가 그 일로 전하에게 알현할 때마다, 통역관은 문제가 많은 관리의 횡포가 두려워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이어서 말하기를, 원세개가 대원군의 손자(이준용 역자주)를 왕위에 옹립하려는 그의 음모에 대해 얘기했다. 그 음모는 민영익에게 발각되었는데, 민영익은 전하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미국 공사에게도  통보했다는 것이다.


서광범을 방문하다. 그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현재 조정에 대해 몇 마디 말을 전해주다. 그의 말은, 내각은 지금 대원군 파와 왕당 파로 갈라져 있다는 것. 대원군 파는 어윤중 탁지, 김윤식 외무, 김홍집 총리이며, 서광범과 박영효는 왕당 파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서광범은, 대원군이 지금 자유주의 파 혹은 왕당 파에 대적할 음모를 꾸미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주다. 그리고 유길준은 대원군 파라는 것이다.


박영효씨는 내가 기대한 것만큼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았으나 친절하게 대해 준다. 그는 뭔가 주저하는 듯 하더니, 나를 학무 참의(국장급 역자주)로 임명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조정을 자신의 손 안에 쥐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참의가 된 것이고 그렇게 여기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게 뭔가! 이것이 남자로서 내리막 길에 있지 않고  출세길에 올랐으니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내가 공직에서 모범적인 일을 할 수있다는 가정을 제외하고는 공직에서 더 바라는 건 없다. 그러면 내가 이 직책에서 잘 하려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오늘 오후 내내 들은 이야기들은, 결코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볼수 없다. 내가 이곳에 와서 기쁜 일은 오직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 있는 일 뿐이다.

 

 

1895년과1896년 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당시의 나이와 상황) 



우범선 38세 (1857-1903) 무관

민비시해 가담자. 일본으로 피신중 고영근에게 피살, 우장춘박사 아버지


이두황 37세 (1858-1916) 무관

                                    
이주회 52 세 (1843-1895) 군부협판

민비시해 조선쪽의 주동자로 사형


金鴻陸  나이 미상: 러시아공사관 통역관                                    

함경도 천민출신, 웨베르공사를 따라와서 10여년을 통역관으로 재직하는동안  매관매직,이권개입, 갈취등으로 미움을 받다. 웨베르가 공사직을 떠날무렵 간계를 써서 외부협판으로 임명되려는것을 윤치호가 막았다. 파면당한 후에 앙갚음으로 임금과 세자를 독살 하려다가 들켜서 참수 당함.(김홍육의 독배사건)

 

                                      대관식 사절단원                                                

 

단장: 특사 민영환 35세 정1품, 해천추범 남김

    
수원: 윤치호 31세 학부협판 종2품


참서관:김득련 46세, 중국어 역관, 문장가, 중국문화예찬자,환구음초 남김 

   
통역관:김도일 우라디보스토크 출신 젊은 통역자, 조선말을 잘 못함


사동: 민영환공의 심부름하는 소년

 

                                    통상교섭 사절단 2진                                            

 

단장:성기운 49세(1847-1924) 대관식 특사와 별도로 파견됨, 통상전문가, 도중에 배멀미로 귀국함, 친일로 전향하고 일본 작위받음.

        

단원: 주석면, 함경도 중인 출신으로 러시아 공사관 통역관, 출발 직전 에  학부참의 로 임명, 귀국후에 지방관찰사, 협판직 에 이르렀음

단원: 민경식, 민영환과 정치성향이 다른 친러진영의 사람

                                     


좌옹 윤치호 연보(年譜)


 
1865년 해평 윤씨(尹氏) 웅렬(雄烈)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출생
1881년(17세 때) 신사 유람단원 어윤중의 수원으로 일본에 가서 동인사에 입학하여 1년간 일본어를 배우고  다시 1883년 1월부터 다섯 달 동안 영어를 배움.
1883년(19세 때) 초대 주한공사 푸트공사의 통역으로 귀국
1884년(20세때) 10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통역직 사임
1885년(21세 때) 상해로 건너가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4년간 영어와 수학 등을 배우다.
1887년( 23세 때)세례받다.
1888년 미국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입학. 
1891년 에모리(Emory)대학에 입학.
1892년 과 1893년여름방학 동안  조지아와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연설.
1893년  에모리대학을 떠나면서 Candler박사에게 선교기금200 불을 맡기다. 
1894년 3월에 상해에서 중국인 馬秀珍과 결혼.
1895년 귀국하여 학부參議
1895년 외부협판(外部協辦)(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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