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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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강릉 선교장과 초당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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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여름방학이면 달려가던 외갓집, 강릉 선교장에 가려면 종로 관수동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로 8시간 이상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갔다. 강원도 대관령을 넘는 해발 8백미터 고갯길을 정철의 관동별곡을 뇌이며 아흔아홉 고비마다 아찔하게 돌아 넘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 찾아간 선교장은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2시간 반 만에 들어섰다. 경주국제펜대회를 마친 손정숙, 송세훈 부부 회원과 우리 부부가 짧은 가을여행 길에 오른 것이다.

“이제 오냐?”하면서 반기시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님 음성은 들을 수 없었지만, 외사촌 동생 이강백이 귀한 민속자료 5호가 된 선교장船橋莊을 지키는 의젓한 관장이 되어 바쁜 중에 우리를 위해 진수성찬으로 차린 점심식사에 초대해주고, 그곳에서 가까운 초당마을의 허난설헌, 허균, 허봉, 허성 등의 문장가 남매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 이내번이 1730년경에 이곳에 전설적인 터를 잡고, 살림집과 별장을 겸한 전원주택을 짓고 살기 시작한 곳이다. 관동지방에서 살림집으로 규모가 제일 크고, 한국건축양식의 원형을 잘 보존한 집이다.

 경포호수가 지금보다 넓었던 시절에 배를 타고 건넌 집이라 배다리집(船橋莊) 이라 불렀다. 선교장 입구의 활기찬 붉은 기둥문, 월하문을 들어서면 넓은 연못과 활래정 간판을 올린 정자가 보인다. 이 연당은 서울 비원의 부용정과 비슷하며, 자연의 품에 안긴 한국 특유의 아름다운 정자의 모습이다. 우리가 한 달만 일찍 이곳에 왔다면 저녁노을에 타는 듯한 분홍 연꽃과 얼굴보다 더 큰 초록 연잎을 보았을 텐데. 

 정문에 들어서면 중문(中門)에 잇대어 넌출문(네쪽으로 된 문)으로 바라지 창(窓)을 만든 문들이 보인다. 선교장엔 아름다운 문들이 첩첩이 서 있다. 여인들의 거처인 동별당에서 남정네가 머무는 서별당과 행랑채로 이어지는 세 개의 기와지붕 중문의 문턱은 남정네들이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었는지 활모양으로 휘어져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이언적의 집 문턱을 넘으며 시선(詩仙)이 될뻔한 우리 국제펜클럽 회장 존 소울 박사가 함께 왔더라면 그의 멋진 여행철학기가 또 나올 뻔했다. 특히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소울 회장이 꼭 와보고 싶어 한 한국문인화의 산실이다.

 

 

다락같이 높은 이 건물에서 남정네 식구들과 많은 문객, 특히 40년을 이곳에서 보낸 차강(此江) 박기정 같은 화객이 모여 다정한 대화를 나누던 사랑방, 열화당이다.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친지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한다”는 부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 안에 새로 만든 ‘열화당 작은 도서관’에 손정숙 회원과 나의 책도 빽빽한 서가에 꽂아놓았다.

 문인화객들을 대접하던 선조의 대를 이었음인지 한국도서출판 단지 조성에 앞장서고, 아름다운 미술도서를 주로 출간하는 도서출판사 열화당의 사장은 이 댁의 자손인 이기웅이다. 

 무엇보다 내가 찾아가 보고 싶은 데는, 방학 때마다 뒷산에 올라 울창한 소나무 아래 돗자리 깔고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뒹굴던 동산이었다. 그 동산에 올라보니 소나무 숲이 더 우거졌고, 뉴욕의 센트럴 파크의 셰익스피어 정원 입구처럼 통나무로 층계와 외등까지 만들어 더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행랑채를 개조해서 자료실로 쓰던 방들은 한옥체험실로 200 여명이 체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식사는 바깥채에 ‘이통천댁 잔칫상’이라는 거창한 간판을 매단 식당에서 들 수 있다.

 우리는 보름 달밤이면 달이 다섯개  뜨는 경포대를 지나, 경포호수에서 가까운 초당 마을에 갔다. 간수 대신 바닷물로 두부를 만드는 초당두부의 원조이다. 허균, 허난설헌 남매의 생가로 알려진 이 터는, 공원이 있는 소나무 밭 사이로 초당 허엽과 그의 자녀 사남매, 허씨 5문장가의 다섯 시비(詩碑)가 바다소나무와 벗하며 나란히 서 있다. 허균의 ‘경포호를 그리워하며’, 난설헌 허초희의 ‘죽지사 3-나의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갯가’가 적힌 시비 앞에 할아버지 손을 잡고 온 미래의 난설헌 같은 소녀도 보였다.

 허균(1569~1618)은 한국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작가이며 파란만장한 정치인이다. 자유분방한 그는 유교국가에서 불교를 숭상한 사람이고, 1616년 1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게십이장'과 '한역서학지도'등 많은 돈을 들여 책을 구입했다. 누이의 작품 ‘난설헌집’을 중국시인에게 주고 번역하게 하여 유명해졌다. 기념관 안에 ‘난설헌집’과 허균의 ‘홍길동 전’ 목판본이 나란히 놓여있다.

  

 

강릉시 초당동 일원을 허균, 허난설헌 문학공원으로 조성하는 데 공헌한 사람은 문인이 아닌, 전 서울대학교 공대건축과 이광로 교수이다. 1999년 강릉시의 문학공원 조성위원이었던 이 교수가 이 생가터를 매입하고 선양 사업회의 후원으로 많은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난초 향기 그윽한 난설헌 차방에서 따뜻한 오미자차 한잔과 강정 한 접시를 비우고, 슬픈 미소를 띠고 앉아있는 난설헌의 동상을 둘러보고, 경포 바닷가를 끼고 강릉 시내까지 이 관장이 차로 배웅해주었다.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이씨조선의 문향에 취한 오늘의 여정을 음미하며 사몽비몽간에 서울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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