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yoon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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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짤스부르크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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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차 국제PEN대회를 마치고

 

   

오스트리아는 누군가가 말한대로 언제나 흰 눈을 이고 서 있는 명미한 알프스산맥과 중세기의 고성, 고딕 성당들, 특히 흘러넘치는 듯한 음악의 물결들을 꼭 만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선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물결이 낙엽지는 가을 거리의 골목 사이로 그리고 우리가 참가한 국제 PEN 회의장, 힐튼 호텔 로비구석까지 넘실거리는 듯 했다.

  그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제50차 국제PEN대회를 마치고, 비엔나 시장의 만찬 초대 자리에 비엔나 아카데미 고등학교 학생들의 왈츠 춤을 넋을 잃고 구경했다. 흰 나비같은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들과 검은 연미복의 남학생들이 짝을 지어 <도나우강의 왈츠>를 돌 때는, 펜 회원들이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함께 멜러디를 따라 불렀다.

 비엔나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3시간 가량 달려 짤스부르크역에 내리면, 짜르싸Salzah 강변에 높이 솟아있는 호엔 짤스부르크성에서 태어난 모짜르트의 환영들이 중세기 도시같은 옛스런 거리와 이 도시를 온통 뒤덮은 듯, 어딜가나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지리적인 환경이 역사적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모짜르트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음악역사상 최고의 천재성을 발휘한 신동, 음악가 중에 제일 어린나이로 음악을 시작하여 음악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청초한 백합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이 전원 도시가 기발하고 열정적인 모짜르트의 어린 마음 속에 위대한 예술감각을 입혀주었고, 그 예술성을 키우며 고전파 음악을 완성시킨 위대한 세 사람(하이든, 베에토벤, 모짜르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짤스부르크는 도나우 강을 따라,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독일로 영국으로 비엔나로 가는 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고, 모짜르트는 이미 6세 때부터 열려있는 이 음악의 길을 드다들며 연주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레오폴드 모짜르트와 어머니 안나 사이에 막내 아들로 태어난 볼프강(혹은 아마데우스; 신의 은총을 입는다는 뜻)은 3세 때 피아노 앞에 앉아 3도의 음정을 찾아내고 그것을 즐겼다고 한다.

4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5세 때는 어려운 협주곡을 작곡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이 곡을 정리하여 쾨헬1번 미뉴에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6세 때,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앞에서 어전연주를 했다. 연주가 끝나고 공주(후의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와 함께 놀다가 그가 넘어지자 공주가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친절한 분이시니 제 아내가 되어주세요.”하고, 정중하게 말한 일화가 있다.

그가 짤스부르크에서 작곡한 것은 대개 다음 여행지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한 것이다. 그는 수 많은 피아노 협주곡, 관현악 협주곡, 쏘나타 환상곡, 오페라곡, 교향곡 등 770여 편의 곡을 작곡했다.

그가 교향곡을 작곡할 때, 제1악장에서 제4악장까지의 전체구상이 머리 속에 동시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악보에 그리는 시간만큼 교향곡 한 곡이 완성된 셈이다. 그가 최후에 작곡한 3개의 교향곡도 2개월 내에 완성되었다.

모짜르트는 오페라를 작곡하는 일을 가장 즐겼으며, 시와 연극이 음악 속에 용해되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는 요술을 <마술피리Magec Flute>에서 볼 수 있다. 이 곡은 1791년에 작곡하여 그해 9월에 바텐에서 초연했다. 그때까지 라틴어나 이탈리어로 부르던 오페라를 처음으로 그의 조국의 언어인 독일어로 극본을 만들어 부른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이 유럽 각지에서 열광적으로 연주되고 있음에도 비엔나는 그를 차갑게 외면했다. 이에따라 가정사정도 어려워져 건강은 더 나빠졌다.

이때 발제크 백작(샬리에르가 아닌)이 레퀴엠Requiem 장송곡을 작곡해 달라고 그에게 사람을 보냈다. 심한 신장병에서 오는 우울증과 병적인 망상 가운데 있던 그는, 그 심부름꾼을 자기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라고 착각하여-그가 작곡중이던 장송곡을 연상한 것이겠지만-공포에 떨다가, 결국 일부를 완성못하고 12월 5일 새벽 이슬 속에 비엔나에서 35세의 젊음을 마감했다.

12월 6일의 장례식엔 아내 콘스탄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Requiem 일부를 완성시켜준 친구 쥐스마이어와 몇 명의 친구들만 참석했다. 그것도 진눈깨비 속에 성 마르크스까지 아무도 따르지 않았으며 그의 애견 한마리만 뒤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프라하의 성당에서 프라하 최고의 예술가들과 합창단의 장엄한 진혼미사가 그의 혼백을 달래주었다.

짤스부르크 시내 번화가인 게트리드가쩨라는 곡식의 거리 양편에, 그 당시 글을 못 읽는 이를 위해 매달았던 곡식모양의 그림과 조각 간판이 그 당시 중세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줄지어 서 있었다.

그 거리 골목 끝에 모짜르트가 태어난 집(현재 모짜르트 기념관) 앞에 길게 걸려있는 오스트리아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어디선가 피아노와 풀륱 콘체르트의 선율이 나직하면서 강렬하게 들려왔다. 모짜르트가 작곡한 풀륱 협주곡 1번일까 2번일까 생각하며, 모짜르트 음악원 Mozarteum이 평화롭게 자리잡은 큰 길로 다시 걸어 나왔다.

거리엔 모짜르트추모 200주년 음악행사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듯 그의 다정다감하고 독특한 웃음소리와 그의 온기가 새삼 느껴졌다.

이제 세계적인 천재 모짜르트의 불꽃 같은 영혼의 음악은 그가 팔방으로 연주하며 다녔던 그 길로 세계의 젊은 음악인들을 모아들였고,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의 가슴 속까지 그 잔광이 일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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