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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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1)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사람은 아담과 이브처럼 지식으로 눈이 열리고 밝아진다. 사람의 눈이 밝아질수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본질은 흐려진다. 


사람의 눈에는 지식이 사람을 지혜롭게 할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사람을 오히려 미신과 무지에 빠지게 한다. 사람의 지식이란 자신이 실은 유기체로 비유되는 사회나 우주의 부분이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것이 미신이며 무지며 탐욕과 분노의 원인이 된다. 


사람의 눈이 이미 선악이라는 지식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전제 조건으로 둔다면 십계명과 같이 선으로 악을 통제하도록 하는 계율이나 도덕이 필요하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안다는 지식 자체가 사람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선이나 악이라는 관념 자체까지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단지 율법만 지키면 된다는 소극적 단계에서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라는 적극적 단계로 옮겨와야 한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다. 달마 대사가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했다고 하는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곧 구약의 완성이라고 믿는 이유를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입사행에 포함되어 있는 행입(行入)으로서의 사행(四行)은 수행자가 지신의 내적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행동과 감정 그리고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입(理入)으로서의 벽관(壁觀)은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사행의 내용은, 첫째 보원행(報怨行)으로, “나는 이전에 알거나 모르거나 남들을 많이 괴롭혀 왔다. 지금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내가 지은 죄의 대가에 불과하다”고 자신에게 말하면서 일체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의 수연행(隨緣行)은, 수행자가 자신에게 “모든 것은 인연의 힘에 의하여 무아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말하면서도 좋은 일이 생기거나 언짢은 일이 생기거나 일비일희하지 않는 것으로, 감정적으로 심신을 동요하지 않도록 통제한다.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으로 “나는 도리(道理)를 알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무위(無爲)에 두고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모든 것은 공이라 생각하여 어떤 욕심도 내게는 없다”는 내적 대화로 욕심을 내지 않도록 통제한다. 


그리고 넷째 칭법행(稱法行)은 “법에는 중생이 없다. 중생이란 관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법에는 자아라는 것이 없다. 자아라는 관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자신에게 설득시키며, 법 자체가 결코 인색하지 않음과 같이 자신도 온 몸과 정성을 다하여 이웃을 위하여 보시하도록 한다. 


이입으로서의 벽관은 자신의 마음을 옹벽과 같이 긴장시켜 밖으로나 안으로부터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벽관은 가옥의 외벽이 밖으로부터의 바람과 먼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과, 마음에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되어 마음 호수가 명경지수처럼 맑고 고요하게 될 때 이전에 탐진치를 일으켰던 어떤 자극이나 상황도 이제는 어떤 심신의 동요도 없이 바라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벽관은 사람이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동의 벽이 되어 탐진치로 동요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벽관의 심리학적 기능은 탈감화로, 옹벽과 같은 부동의 태도로 탐욕이나 분노로 조건화된 자극이나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이 점차 소거된다. 


심리학자들은 각종 공포증 환자들에게 벽관과 비교되는 이완훈련을 시킨 후에 이완된 상태에서 공포증을 일으키는 사물이나 상황에 점차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공포증을 치료한다. 공포증을 느끼게 되면 심신이 동요하게 된다. 그것과는 반대로, 이완은 심신의 동요를 저지한다.


이완이 유지되고 있는 한 공포반응은 일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쌍 지워 좋지 못한 현상을 좋은 현상으로 전환하게 하는 방법을 대치(對治) 또는 대법(對法)이라 부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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