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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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7)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예수님이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도 공안이며, 병든 사람을 고친 것도 공안이며,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고 하는 것도 공안이며, 죽은 자를 살린 것도 공안이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것도 공안이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도 모두 사랑의 공안이다. 


만일 누가 예수님에게 왜 하나님이 태초에 선악과를 에덴동산 한복판에 심어 놓아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게 했는가를 묻는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가나안 잔치 집에서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시장하여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다가 없자, 잎만 무성한 그 나무를 저주하여 시들어 말라 죽게 하였다. 그 때는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었음을 성경은 지적한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장님이 된 것인가를 제자가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장님이 되게 하실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흙에 자신의 침을 섞어 장님의 눈에 발라 그의 눈을 뜨게도 하셨다. 그 모두가 사람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다.


화두는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언행에 대하여서도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야 한다. “태어나기 전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화두도 있고, “한 손으로 치는 벼락과 같은 박수”라는 화두도 있다. 


이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화두를 의심하고 의심하다 보면 마치 “밤송이를 통째 삼킨 것”과 같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갈등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마침내 생각과 문자를 떠난 그 본의가 이심전심으로, “아! 그것”이라는 자기만이 깨닫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역사”라 이름한다. 


그러나 성령은 밖으로부터가 아닌,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온다. 인간의 본래 모습이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숨,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 기독교는 선악이라는 인간의 지식으로 집을 떠나게 된 아담과 이브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과 같다. 에덴은 인간이 세상에서 배워 익힌 분별심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낙원과 낙원 아닌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가 낙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 명령은 천국에서 지킬 명령이 아니고, 바로 지금-여기서 지켜야 할 명령이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라면 이 곳 이외 다른 천국이 있겠는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 땅과 천국이 따로 있지만 낙원을 잃게 한 생각만 떠나면 여기가 바라던 그 천국이 된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지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 위에 또 천국을 바랄 것인가? 예수님도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장차 따로 올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 천국으로 변해있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달마가 동쪽에서 온 연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응답한 선사, 그것은 전혀 시비분별이 없고 인색함이 없는 잣나무, 법에 일치되는 본심을 무언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이 “네 몸이 곧 성전”이라 하시거나 “네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시는 그 무언의 손가락은 어디로 향해 있으며,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가리키는 그 손가락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나의 살을 참 음식으로 먹고, 나의 피를 참 음료로 마시라”고 하는 공안보다 더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공안이 있을 수 있는가?


15. 평상심의 도


선에서는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라 한다. 평상심은 말 그대로 일상적인 마음을 말한다. 탕자에 있어서 평상심은 무엇인가? 열등감이나 무력감에 의하여 항상 움츠리고 있는 사람의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런척하며 허세를 부리고 사는 사람의 평상심이란 어느 때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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