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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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실은 기독교와 불교의 수행방법에는 서로 명칭은 다를지라도 그 원리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의 “깨달음”과 기독교에서의 “거듭 남”도 다르지 않고, “공의 지혜”와 “성령의 지혜”도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 유기체 모델이므로 서로 다를 수 없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깨달음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는 불교의 방법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게 하는 기독교의 방법을 비교하면서 인간이 “본래 부처(本來佛)이라고 하는 불교와, 인간의 ”몸이 곧 성전“이라 선언하는 기독교 간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동시에 불교의 수행방법을 어떻게 기독교 신행에 접목시킬 수 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7. 화엄사법계(華嚴四法界)


선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에는 화엄사법계를 설한다. 화엄이란 갖가지의 꽃들이 모여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원을 이룬다는 것으로, 화엄경은 인간이 속해 있는 천지만물을 그런 화원과 같은, 유기체로 본다. 


화엄사법계는 꽃들로 장식된 화원과 같은 세계 안에서 네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그리고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네 가지다. 


첫째의 사법계(事法界)란,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저녁이 되면 달과 별들이 나타나며, 구름이 모이고 비가 오며,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과 같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관찰할 수 있는 밖의 세계를 뜻한다. 둘째의 이법계(理法界)는 사람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사람이 보고 경험하게 되는 사물사건의 현상이면에는 어떤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사무에법계는 사람이 이제,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현상이면에는 ”만유인력”과 같은 법칙이 장애 없이 항상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지막의 사사무애법계는 사람의 눈으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사물과 사물 그리고 사건과 사건이 실에 있어서는,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가 의존한 결과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현상과 현상이 어떤 경계나 어떤 분별이나 어떤 장애도 없이 소통하며 무한정의 인과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화엄사법계는 단지 우리가 물리학이나 화학을 학교에서 배울 때처럼 사물사건의 이면에는 그러한 물리적 화학적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지식으로 끝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도 마음도 그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 법칙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일치되도록, 그 법칙에 일치되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마치 과학자가 인간을 자연에 속한 것이고, 자연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자신이 발견한 사실 그대로 자연의 부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의미가 그것이다. 


우리는 화엄사법계 중에서 이사무애법계까지는 우리의 생각과 지식으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사사무애법계라는 진실 앞에서는 뒷걸음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물었을 때, 예수님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가진 것이 많은지라 슬퍼하며 돌아갔다고 하는 것과 같이, 실은 누구나 사사무애법계에 살면서도 그 법에 일치되는 삶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사사무애법계에 들어간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떠났다. 그는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에게는 그가 우주자연과의 일부분으로 본래 가지고 있는 지혜가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게 됨으로써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오감은 누구보다 민감하며 자신의 마음이 무지와 미신으로 가려져 있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을 이해하거나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거나 또는 사물의 원리를 이해하거나 육체적으로도 오고감에 자유로울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실은 인류가 오늘 날 자랑하는 21세기 과학기술문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고 자연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간 자신마저 사사무애법계에 일치되는 본심으로 돌아갔을 때 인간이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는, 지금 우리가 염려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참으로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낙원이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성도가 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 숨을 쉬며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몸에 붙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 바로 교회라는 유기체를 교란시키는 마음이라고 지적한다. 인간 사회를 유기체로 보거나 인류가 속한 우주를 유기체로 보게 되면, 인간이 가진 지금의 마음이란 유기체의 부분으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게 되어 있는 본심으로부터는 크게 어긋나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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