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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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3)-“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4)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심념처는 자신의 마음에 욕심이 있는지, 분노가 있는지, 어리석음이 있는지 관찰하여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법념처는 자신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의 대상이 되는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환경, 육경(六境)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으로부터 수호하는 방법이다. 


사념처에는 숨을 헤아림으로 고른 숨을 유지하게 하는 수식관(數息觀)을 바탕으로 ‘지금-여기 깨어있는 상태에서 어떤 심상이나 감정에 의하여 마음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이 순간순간 자기의 몸, 느낌, 마음, 그리고 환경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어떤 기대나 판단도 없이 인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내적 관찰법을 '마인드풀내스(mindfulness)'라 부르기도 한다. 


사념처를 통하여 성취되는 것은, 삼독(三毒)에 해당되는 탐진치를 대신하여 삼학(三學)에 해당되는 계정혜(戒定慧)다. 사념처를 학습원리를 적용한 행동치료(行動治療)라는 관점에서 보면, “육체적 욕정이 일어나면 육체는 오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부정관(不淨觀)으로 그것을 통제하도록 하거나 상대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면, 자비관(慈悲觀)으로 분노를 통제하는 것과 같은, 심상을 이용한 인지-행동적 접근법이 된다. 


이입(理入)으로서의 벽관은 마치 집을 둘러싸고 있는 옹벽이 밖으로부터의 바람과 먼지를 막아주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긴장시켜 외적 자극이나 내적 자극에 의하여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일으키지 않도록 수행하는 방법이다. 벽관은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벽이 되어 자신을 보는 것이다.


벽관의 결과는 이전 행동 경험에 의하여 학습된 어떤 기대나 예상이나 편견이나 감정에 의하여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마치 거울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사하는 것처럼 사물이나 사건의 진실한 모습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벽관은 학습된 감정이나 행동을 소거(消去)하는 심리학적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달마가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한 이입사행 중 심상이나 내적 대회를 통한, 인지-행동적 접근법에 속하는 사행은 아직 수행의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생각마저 끊어버리게 하는 벽관은 수행의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행입(行入)으로서의 사행은 십계명을 목표행동으로 설정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이 목표행동에 일치하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법이다. 


이입(理入)으로서의 벽관은 아담의 망심에 속하는 사유분별을 차단하고 본래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의 숨, 성령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지금도 성령을 숨 쉬며 성령으로 생을 지속하고 있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 즉 성령으로 ‘거듭 남’에 비교된다.


이러한 견성의 결과는 자신이 곧 성전인데도 그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더럽히게 하였고, 자신이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이면서도 자신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아니라고 부인하게 한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본심이기도 하며 온 우주에 공기처럼 가득 차 있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숨 쉬며 우주와 하나가 되며 자유자재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우리가 우주를 유기체로 보게 되면,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들은 각기 다른 모양, 각기 다른 책임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있는가 하면, 발도 있고, 손도 있다. 눈이 있어서 보게 하고, 입이 있어서 먹게 하고, 창자가 있어서 소화하게 하고, 허파가 있어서 또한 숨을 쉬게 한다. 이러한 유기체적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한 부분이 수고와 고통을 감수하므로 다른 부분이 쉬거나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게 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수고가 많으나 오른손이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오른손이 왼손에 금반지를 끼워준다. 우주를 유기체로 보면 거기에는 너와 나라는 것도 없고, 선악도 없고, 미추도 없으며 죽음과 삶이라는 관념도 있을 수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모든 것은 공 또는 반야의 지혜로 채워져 있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모든 것이 성령의 지혜와 은혜로 채워져 있으며,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카오스(chaos)이론에서 ‘나비효과’를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작다고 해서 작은 것이 아니고, 크다고 해서 큰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연기하며 연기의 이법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보라고 가르치는 세계가 유기체의 세계이며, 바울이 보라고 가르치는 교회 역시 유기체에 비유되는 교회다. 우리가 성서를 유기체관으로 보면 성서의 본의가 명확하게 들어난다. 본래 자기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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