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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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2)-“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3)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모든 행적이,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의 본래 모습 그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주신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후처럼, 아담의 망심에 속하는 마음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무엇을 볼 수도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담의 망심으로 섬기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아담의 망심으로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한 바로 그 마음, 망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하고 있다. 이래서는 결코 ‘거듭 남’을 체득할 수 없다. 


우리가 구약성서의 특징을 십계명을 중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명하게 분별하게 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약성서를 선악이라는 분별까지도 없어진, 무조건 사랑과 용서를 가르친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착한 생각으로 착하지 않은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인지적 단계로부터 점차 벗어나,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 간의 관계처럼 선악이나 귀천이나 미추나 상하라는 어떤 분별도 없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으로, 선에는 달마 대사가 도(道)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설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을 참고할 수 있다. 


이입사행론은 행입(行入)으로서의 사행(四行)과 이입(理入)으로서의 벽관(壁觀)으로 나누어진다. 행입으로서의 사행은 “올바른 생각으로 올바르지 않는 생각”을 다스리게 하는 방법이고, 이입으로서의 벽관은 어떤 허망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도록 내적 마음을 옹벽과 같이 긴장시키는 방법이다. 


행입으로서의 사행은, 첫째 보원행(報怨行)으로, 수행자가 자신에게 어떤 분노나 원망스러운 생각이 일어나면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알거나 모르게 저지른 이전의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로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일체 남을 원망하거나 남을 미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으로, 수행자는 “모든 것은 무아(無我)로 인과(因果)의 힘, 연기의 법칙에 따라 변하거나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자체에 크게 동요됨이 없이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은 이전에 내가 올바르게 행동한 연분(緣分)에 의한 것이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 것은 내가 어리석게 행동한 연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여 희로애락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으로, “자신은 도리(道理), 연기의 법칙을 알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무위(無爲)에 두고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모든 것은 공이라 생각하여 어떤 욕심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내적 대화로 욕심을 멀리하도록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넷째는 칭법행(稱法行)이다. 칭법행은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면서 공을 본질로 동체(同體)를 이루고 있다는, 연기의 법을 바탕으로 “법에는 중생이 없다. 중생이란 관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법에는 자아(自我)라는 것이 없다. 자아라는 관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알아, 법 자체가 인색하지 않음과 같이 자신의 신명과 재산을 다해서 이웃을 위하여 보시하는 것이다. 


행입으로서의 사행은 우리에게 욕심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고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날 때 자신이 자신에게 말하는, 내적 지시(指示)로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인지적 접근법이다. 개인의 내적 대화가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 또는 내적 대화가 비합리적인가, 아니면, 합리적인가에 따라 개인의 현실경험도 다르게 된다는 원리에 따른다면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사행은 누구에게나 유익한 자기통제법이다. 


달마의 행입으로서의 사행은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사념처(四念處)와 병행된다. 사념처는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로, 신념처는 자신의 몸을 통하여 법에 일치하지 않는 욕정이나 올바르지 않는 행동이나 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착한 생각으로 이를 끊거나 호흡과 행동으로 이를 통제하는 방법, 욕심을 떠나는 데서 오는 기쁨 등을 체험하게 하는 방법 등을 배우는 것이다.


수념처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오감과 마음을 통하여 들어오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변별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하여 어떤 감정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평화로운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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