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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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9)-“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예수님은 오랜 금식 후 사탄에 이끌려 시험을 받게 된다. 사탄의 첫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그 시험을 이기신다. 


 인간의 죄는 물질로 된 육체에서 시작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이 탐욕을 만들고, 분노를 낳게 하며, 어리석은 행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간의 몸이 본래 성전인데도 “도적의 소굴”이 된다. 


 본래 비어 있던 마음이 육체적 욕심으로 엉기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은 본심,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숨으로 생명을 얻게 된, 바로 그 모습과 지혜를 잃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도적을 쫓아내는 목숨을 건 소탕전이다. 


 자신이 성전이 된다든가 포도나무에 가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선과 악을 알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감추고 숨기면서도 자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될 수 있는가? 천당과 지옥을 생각하면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될 수 있는가? 이웃을 자타나 내외로 분별하면서도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예배하라고 성서는 말씀하신다. 영과 영 사이에 말이나 생각, 분별망상이 개입될 수 있겠는가? 선악이나 천당지옥으로 분별하고 정죄하면서도 동일한 성령을 숨 쉬며 동일한 성령으로 성도들을 한 몸을 이룰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피를 마시고 나의 살을 먹어라”고 독촉하신다. 지금 우리가 지금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동침하여 낳은 후손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한 바로 그 분별심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을 수는 없다.


 분별심이란 귀나 발이 실제로는 몸에 붙어있으면서도, “몸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사코 부인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의 현주소가 그렇다. 


 유기체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분별이 없다. 그 세계에 속한 모든 것은 창조주의 뜻과 법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러한 자연의 법칙, 우주의 법칙을 불교에서는 계정혜(戒定慧)라 부른다. 계를 사랑(Love)이라고 하고, 정을 평화(Peace)라 하고, 혜를 인간이 본질로 가진 지혜(Wisdom)라 한다.


 공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면 계정혜가 성취될 수 없다. 성서에도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지혜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본질 역시 계정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낙원을 사자와 어린사슴이 함께 있으나 해함이나 해 받음이 없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 낙원은 곧 계정혜로 채워진 곳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의 고통이나 불평등의 기원은 인간의 본질로 가진 계정혜와 함께 할 수 없는 자기라는 분별적 의식, 탐진치에 있다. 

 

 

 제2장: 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9. 대법(對法), 중도(中道)를 간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보면 어둠과 빛, 밤과 낮,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새와 물고기, 남자와 여자 등으로 쌍(雙)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에는 아담과 이브의 용서받지 못할 큰 죄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어둠과 빛, 밤과 낮, 바다와 육지 등은 서로 맞대고 있는 자연현상이다. 선과 악을 위시해서 자타나 내외나 성범이나 미추나 귀천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가치판단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대법을 이루고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불, 산과 호수, 음과 양 등 자연현상으로서의 쌍은 서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라는 조화와 평화를 이룬다. 즉 서로 반대되는 모양이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으로서 서로 없어서는 안 될 대상이 된다. 


 동양의 산수화(山水畵)는 서로 대비되는 산과 물이 “산은 산, 물은 물!”로 있으므로 서로 원만함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서 생긴 선악이라는 관념이나 미추라는 관념은 자연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게, 둘 중 하나를 택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판단을 요구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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