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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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4)-“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은 서로 다른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전체를 살게 한다. 다시 말하면, 발은 발로서, 손은 손으로서, 눈은 눈으로서, 귀는 귀로서, 코는 코로서의 책임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 각각에게 주어진 대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유기체는 죽을 수밖에 없다. 


 무화과나무는 뿌리와 둥치와 가지와 잎으로 구성되어 있는 동시에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를 열리게 하는 것으로 배가 고픈 사람이나 동물에게 먹이를 제공하게 되어있다. 꽃이 있어서 나비와 벌이 있는 것과 같이, 우주자연에 속한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함으로서, 남을 위한 것이 곧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이타자리(利他自利)의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고,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으로써 포도를 열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라고 성서는 묻고 있다. 소금의 본질은 짠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해도 소금이 녹아 없어지면서 다른 것에 짠 맛을 내지 않게 하면서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면 그 소금 역시 길 바닥에 버려져야 할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소금은 다른 것을 위하여 녹아 없어져야 하는 것이 소금의 본질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이유가 그렇게 상즉상입(相卽相入)으로 조화를 이루며 서로 희생하며 봉사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예수님의 몸에 붙은 가지로 예수님을 진실로 영접한 사람이라면 그 역시 열매를 맺어 배고픈 사람이 먹도록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가 곧 착한 사마리아인이며 참 이웃이다. 성서는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곧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곧 분별망상으로 죽어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이미 “도적의 소굴”로 변하여 버린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깨끗한 성전으로 되돌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의 몸도 성전이며, 개인이 속한 사회도 성전이며, 자연도 성전이며, 우주도 성전이다. 모든 것은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있고, 한 성령으로 숨을 쉬게 되어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은 자신이 한 몸에 속해 있는 귀나 발이면서도 자신은 눈이나 손이 아님으로 한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망상에 빠지게 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와 지체 간에 있을 수 없는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나 귀천이라는 분별망상을 일으켜 결국 자신도 죽이고 전체도 죽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 주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한 몸에 속한 지체와 지체들 간에 발견할 수 있는 희생과 사랑을 대표한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또한 그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고 있었던 사람들을 형제자매라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그러한 말씀이나 행동이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그들이 믿고 있었던 공회에 대한 반역이었다.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이 감히 쳐다 볼 수도 없는 두렵고 떨리는 신으로 섬긴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어린아이였지만 예수님을 죽인 그 사람들은 수치심으로 자신들의 몸을 두꺼운 옷으로 가리고 있었고 두려움으로 그들 자신들을 장막 뒤에 숨기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나 두려움을 몰랐던 그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가 되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된다. 


 아담의 망심에서 아담의 본심으로 거듭 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방법으로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 길이다. 예수님은 자신들을 유대인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많은 돌로도 유대인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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