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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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0)-“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거듭 남’이란 무엇인가? 거듭 남이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선악이라는 분별이나, 그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도 없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은 낙원을 낙원으로 즐길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고, 비록 개인이 처한 현실적 환경이 낙원이 아닐지라도 그 환경을 낙원으로 즐기며 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낙원인가 지옥인가는 하는 것은 오직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 선에서는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선언하고 있다. 선악과에 얽힌 이야기 역시 일체유심조와 병행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지각하는 자신과 사물은 어떤가? 우린 지금 아담의 본심으로 자신을 보며 세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밝아진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고 있는가? 자신의 눈이 지금 자신이나 세상을 선악으로 판단하고 부끄러움의 자신을 감추거나 두려움으로 자신을 숨기는 눈으로 오염된 것이라면 우리에게 비록 낙원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낙원으로 즐길 수는 없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데도 마찬가지다. 성서는 이미 아담의 망심에 속하는 인간의 말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가 아담의 망심에 속하는 우리의 마음으로 성서를 읽을 때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는 성서의 본의를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본의의 깨달음이란 결국 무념이라고 하는 ‘거듭 남’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 남’을 성취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너희 몸은 곧 성전이라”라는 말씀과 “너희는 나의 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다”라는 말씀으로 사람이 어떻게 다시 거듭나게 되는가에 대한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거나, 자신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는 방법은, 자기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우린 견성(見性)을 선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 두고 있는 선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구체적 방법을 어쩌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곧 집을 떠났던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 아들의 특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되찾게 되는데 있다. 


 자신이 성전이 된다든가, 예수님의 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다든가 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지체가 된다든가 하는 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 선악이라는 관념이나 지식도 없었고, 벌거벗고 있으나 부끄러움도 없었던 그 때로 회귀하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될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간다는 말인가? 성서는 성령으로 ‘거듭 남’이 그 방법임을 암시하고 있다. 실은, 누구나 그가 어떤 가문에서 어떤 형태로 태어났건 간에 이미 성령으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흙, 즉 물질로 구성된 아담의 육체가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것과 같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처럼 본래 성령으로 태어난 것이다. 만일 인간이 본래 아담과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았다면 ‘거듭 남’이란 말이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본래 없었던 어떤 것을 잉여로 받거나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로 자신의 내면에서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빛을 발하고 있는 성령을 보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말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듭 남’이란 말이 성립될 수 없다. 


 어떻게 ‘거듭 남’이 가능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두 가지, 그러나 결국 한 가지로 통합되는, 선불교가 견성을 위한 방법으로 적용하는 선수행법과 지금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학습된(learned)' 부적응 행동을 소거(消去)시키는 방법으로 적용하는 행동수정의 방법을 자신으로 하여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되돌리게 하는 방법, 즉 견성 또는 거듭 남을 위한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으로 강조하는 기도(祈禱) 또는 묵상(?想)기도를 역시 여기에 통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견성이나 ‘거듭 남’을 위한 이러한 방법의 공통점은, 심신에 ‘잠잠함’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으로, 심신의 ‘잠잠함’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탐욕이나 분노나 어리석은 생각을 차단하고 점차 소멸시키는데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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