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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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바울 사도가 성도와 교회의 관계를 유기체와 유기체에 속한 지체들의 관계로 비유하는 것을 대인이 속한 사회, 그리고 인간이 속한 우주만물에 일반화시킨다면 사회가 유기체고 우주가 유기체다. 그러나 인간의 고질적인 망상 또는 사고방식은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는 귀나 발이 몸에 붙어 있으면서도 “나는 눈이 아니니” 또는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는 본래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본질을 잃게 되는 것으로, 결국 나무둥치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둥치로부터 잘라내어 말라 죽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리학자로 유명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인간이 우주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자신 나름으로 경험하고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됨에 따라 자신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의식상의 망상을 일으켜 자신을 스스로 고통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란 우리들이 소위 ‘우주’라고 부르는 총체의 일부로서 시공간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나름으로 경험하고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의식상의 시각적 망상을 가지게 된다. 


 이 망상이 자신의 개인적 욕망으로 눈을 어둡게 하고 주위에 가까이 있는 몇 사람에게만 관심을 가지도록 구속하는 감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들이 성취해야 할 과제는 열정의 폭을 넓혀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과 자연 전체의 아름다움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자의 심리학에서도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환경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고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아담이 스스로 망심을 일으켜 낙원으로부터 스스로 쫓겨나게 한 것과 다름이 없다. 


 개인이 속한 사회나 우주는 유기체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자신이 포도나무에 비유되는 예수의 몸에 붙은 가지가 된다는 것은 곧 자기라는 생각마저 버림에 있다. 이웃이 모두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 동시에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 간에는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라는 분별이 그 안에 없다. 아담과 이브의 죄는 선악이라는 관념을 일으킴으로써 아담은 자기의 갈비뼈에서 나온 이브까지도 원망하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는 이전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던 것이 이제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나누어져서 남자와 여자라는 관념이 생기고, 휴식과 노동이라는 관념이 생기고, 욕정과 산고(産苦)라는 것이 생기고, 친구와 원수라는 것이 생기고,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불교 역시 우주를 가지각색의 꽃들이 모여 꽃밭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화엄(華嚴)의 세계로 본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포도나무, 성도들을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 그리고 하나님을 포도원을 가꾸시는 농부에 비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면서 연기(緣起),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인과(因果)의 관계 또는 통합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유기체관을 바탕으로 불교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는 명제(命題)로서 사법인(四法印)이라는 것이 있다. 사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蓋苦), 그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제행무상이란 현재 과학자들이 “나비효과”라고 하는 것처럼 우주에 속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므로 어느 한 가지가 변하면 모두가 따라 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법무아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몸이 오장육부로 구성되어 있고, 오장육부는 무진장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고, 개개의 세포 역시 DNA와 같은 하위 구성분자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과 같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에 있는 것이므로 어떤 것에도 자기(自己)라는 고정된 실체를 가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일체개고와 열반적정이란 것은 무상과 무아라는 것이 우주의 진실한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현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생명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부나 명예를 영원할 것으로 기대하게 될 때, 그러한 현실과 망상 간의 괴리에 의하여 고통이 오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그러한 망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각각 말한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의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과 결합하게 되면서 생긴 선불교의 수행 목적은 견성, 즉 무위자연의 일부로서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데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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