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bokyung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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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3)
kimbokyung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3)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지난 호에 이어)

 

제 1 장: 인간의 본질

 

 1. 유기체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세계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 예수를 영접한 성도들을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하심으로써 예수님과 성도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가 동체(同體)임을 선포하신다. 포도나무가지는 포도나무둥치에 붙어 있음으로 해서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수액을 공급받기도 하고, 하늘로부터 햇빛도 받기도 하고, 공기로 숨도 쉬면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농부는 밤낮으로 포도나무와 가지들이 잘 자라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키고 가꾼다. 기독교 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예수님과 자신 그리고 하나님이 한 몸과 같은, 불가분의 유기체적 관계에 있음을 확신하고 실제로 자신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계속 포도나무와 숨을 쉴 수 있도록 ‘자기’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데 있다.

 

 창세기는 인간의 조상 아담이 본래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으로, 하나님과 아담이 둘이 아님, 즉 불이의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이브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知識)의 나무열매,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본래 둘이 아니었던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가 둘로 갈라졌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인간이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자 말자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곳은 낙원이었다. 낙원에서는 어떤 생각도 일으킬 필요가 없다. 시장하면 먹고, 피곤하면 자면 된다. 아담과 이브가 본래 낙원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고 또한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것이 낙원을 잃지 않고 사는 방법임이 분명하다.

 

 뱀의 유혹을 받아 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지 그 의도를 의심하고 자신들도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자 말자 그들은 낙원을 낙원으로 즐기며 살 수 있게 하는 심리적 조건을 이미 상실해 버린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담과 이브가 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이유를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것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을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原罪)의 탓으로 두고 인간이란 본래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정죄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아니면 영원히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비천한 존재로 보아왔다.

 

 그러나 아담이 낙원으로부터 쫓겨난 이유를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물론 불복종만 아니었더라면 선악과를 따먹는 일도 생기지 않았겠지만)에 무게를 두기보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인지(認知)의 문제에 강조점을 두게 되면 인간과 하나님이 다시 화해하는 방법이 단지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직접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비유하면서 성도 중에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이면서도 지체로서의 책임과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대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한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전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 비교적 더 약한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바로 따르는 지체입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와 교회의 관계를 유기체와 유기체에 속한 지체들의 관계로 비유하는 것을 대인이 속한 사회 그리고 인간이 속한 우주만물에 일반화시킨다면 사회가 유기체고 우주가 유기체다. 그러나 인간의 고질적인 망상 또는 사고방식은 자신을 전체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는 귀나 발이 몸에 붙어 있으면서도 “나는 눈이 아니니” 또는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결과는 본래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본질을 잃게 되는 것으로, 결국 나무둥치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둥치로부터 잘라내어 말라 죽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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