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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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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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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비를 시청하지 않은 이유는 바보상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정주부에 학생, 직장의 3중 소임을 가졌으니 단 10분인들 편안히 티 비를 시청할 여유가 없었다. 어린이프로 채널을 틀어주면 깔깔거리며 즐기는 사이 빨래, 청소, 조리를 하였다. 티 비는 함께 놀아주는 아기보기이며 정다운 장난감 상자일 뿐 아니라 글자와 숫자도 깨우치고 노래 춤 게임을 가르쳐 주는 엄마의 보조교사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남편이 한국과학진흥원의 브레인21교수로 초청되어 한국에 장기 체류하게 되었다. 국내 상황은 이른바 IMF사태로 기업의 파산과 실직자들로 인해 경제적 대공황의 어려운 시기였는데 티 비 연속극이 크게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티 비 앞에 모여 앉아 함께 울고 웃고 화내고 자신들의 내적 감정의 응어리들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인기연속극 상연시간이 되면 나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치 거의 만사를 제쳐 놓고 티 비 앞으로 달려가는 듯하였다. 일상의 대화도 티 비속의 배역이나 대사를 놓고 침을 튀기며 왈가왈부하다가 드라마 속에서처럼 서로 틀어져 헤어지기도 하였다.

 

살기가 버겁고 힘들어 체계적이거나 이성적인 사고판단 대신 마음에 찌끼를 남기지 않는 표피적인 감정을 다스리며 일상을 날려 보내는 듯하였다. 티 비를 보지 않으면 세상물정 모른다는 역설이나 바보상자라는 말은 이때부터 흘러 나왔던 듯하다.

 

유례없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접촉제한과 외출제한을 강요하고 삶의 틀을 뒤 흔들어 놓았다. 일상생활은 온라인으로 처리하고 행동반경은 집안으로 몰리게 하였다. 양쪽 눈 백내장 수술을 계획하였는데 한 달 후에 있을 오른쪽 눈 수술이 취소되어 오히려 밸런스가 맞지 않는 두 눈의 시력으로 인해 글 읽기가 불편하게 되었다.

 

억제된 시간의 축적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인터넷, 티 비와 가까워지게 되고 그 동안 받아놓기만 한 수 십 개의 비디오테이프들을 열어보기 위해 지하실 티 비방을 오르내렸다.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수하물을 찾아가라는 전지가 우편함에 들어있었다. 누가 무엇을 보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직원이 밀고 나오는 커다란 수하물을 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삼성스마트 티 비. 토론토에 사는 딸이 보낸 것이었다. 거실에 설치하고 넷플릭스(NETFLIX) 연결까지 마친 티 비를 켜니 온 방안이 금 새 거대한 극장처럼 밝아졌다. 전자기기의 업그레이드나 새 모델에 별로 관심이 없어하는 남편도 ‘아직까지 육중한 상자 티 비를 이용하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한마디 하고 실죽 웃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배우들이 배역소화를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극작가가 이어가는 이야기 줄거리를 따라 가노라면 살아 움직이는 배역들의 감정표현이 내 것이 되어 몰입하게 되었다. 연속극인 경우 그 다음이 궁금하여 쉽게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하루에 2편, 3편, 시간을 잊고 열중하여 시청하였다.

 

머릿속엔 극 속의 사건들이 꽉 차서 어느새 배역의 한 사람이 되어 감정의 기복이 흐르고 있었다. X세대가 무엇인지,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세대의 사고와 사회풍조가 공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바보상자.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는 옛 일들을 떠 올리게 한 사건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티 비를 설치하면서 모뎀이 너무 낡았으니 회사에 전화해 새것으로 바꾸라고 하였다.

 

어렵사리 연결된 회사직원은 이것저것 묻고, 이리저리 해봐라 한참 하더니 한 달에 7달러씩만 내면 새 모뎀을 직접 설치해 주겠다고 하였다. 다음 주 목요일로 약속했는데 오지 않고 열흘이 넘도록 연락두절이더니 급기야 모뎀이 나가버린 것이다.

 

티 비는 물론 인터넷도 셀폰도 모두 정지되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11번째 이야기까지 보았는데. 금단현상이라도 일어난 듯 안절부절이었다. 주말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회사의 응급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또 다시 이것저것 묻는 직원에게 언성을 높였다. 매달 인터넷 사용료 만 90달러씩을 내는데 이런 서비스를 받을 바엔 아예 회사를 바꾸어버리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오늘 드라마의 12번째 이야기. 사실상 시즌 종영 편을 시청하고 나니 후련해지는 마음 한 귀퉁이로 회사직원에게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허구의 이야기에 흠씬 빠져서 함께 허구 속에서 행동하다가 허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바보’라고 한 저명한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바보상자에 갇히지 말아야지.

 

 그런데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응급서비스 직원은 모뎀도 설치도 모두 무료로 해 준 것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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