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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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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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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얼굴표정이 갈팡질팡하다가 굳어버린다. 까슬한 두 손에 맞잡힌 채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니 웃는 듯 주름 잡힌 눈가에 어둔 시름이 스친다.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요.’ 철벽같은 병마와 사투를 벌이다 문득 가지에 붙어있을 때 꽃다운 인사를 하고 싶어진 거였다. 


자신의 생각과 꿈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빚어내던 뜨거운 열정의 손, 많은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고 쓰다듬어 주던 부드러운 손, 위로와 사랑을 전해주던 따뜻한 손길이었는데 온기가 빠져나가는 듯 딱딱한 막대기처럼 차가움마저 느껴진다. 이 손으로 전하려는 의미는 무엇일까. 


몇 해 전, 생전 이별 식을 가졌던 내과의사 이 박사가 떠오른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그는 의식이 창창한 동안에 정다웠던 친구들을 불러 고마웠던 인사도 전하고 지난 삶을 반추도 하면서 함께 웃고 즐거움을 나누다 잘 가, 잘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작별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손을 잡고 흔들어대던 그의 반가움은 나이보다 더 뒤로 물러선 관조의 모습으로 비쳐 마음 한 구석이 저렸었다. 그 때 100여명을 예상했던 그의 잔치에는 세 곱절이나 되는 인파가 몰려들어 웃음이 넘치는 이별 식을 하였다. 참신한 생각, 바람직한 종결이라고 저마다 긍정적인 찬사를 보내며 발길도 가볍게 헤어졌다.


바람직한 종결이라니 바람직한 인생이란 또 무엇일까. 인터넷으로 받은 어느 글에 이런 것이 있었다. ‘50대 중반쯤 인생의 정점에 서고 60대에는 관록으로 대접을 받고, 그 이후에는 원로로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생이라 하였다.


백세시대에 대입하면 연령대 구분에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열성을 다해 이룩한 삶의 성취에 존경을 받은 후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기본 사조에는 동감이었다. 


희랍신화에는 상대적인 시간의 신(神) “카이로스”와 절대적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있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기도 하여 같은 일분의 시간이더라도 사람에 따라 길게도 짧게도 포착되어지는 정신적이며 주관적인 시간인 반면 “크로노스”는 달력에 맞추어 시계의 초침과 함께 흘러가는 자연적이며 절대적인 시간을 말한다. 


인간은 나이나 병으로 인해 삶의 능동적 역할 면에서는 물러나더라도 살아내야 할 자연적 절대시간 “크로노스”는 똑 같이 맞이한다. 사색하는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라면 젊은이들에게 지혜와 교훈을 주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하지만 인위적으로 단절한 후의 시간이 과연 바람직한 종결일지는 모를 일이다. 


가을의 초입에 몇 분의 영결식이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길게 줄 서있는 조문객들을 바라보았다. 고인의 지난날이 영상사진에서 웃으며 활기차게 삶의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난데없이 바람직한 종결이란 무형의 형상이 슬며시 겹쳐 들었다. 진즉 생전이별 식을 거행하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초라한 자신,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생전 이별이나 존엄사 선택의 진짜 깊이 감춰진 이유라 한다.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의 발로일 것이다. 그런데 조문객이 적은 영결식장에 가면 어찌나 쓸쓸한지 망자의 감고 있는 눈자위에 외로운 그늘이 덮이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마지막 길을 전송해 줄 친구 친지가 별로 많지 않다는 반증이라도 되는 듯 눈물이 밴 한숨이 나온다.


살아생전에 함께 웃고 즐겁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머리를 맞대고 서로 가슴 아파하며 고뇌하던 정다운 동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멀리 서서 ‘잘 가라’ 손짓만 하는 친구들을 그려보았다.


영결식은 산자들의 예식이다. 소중한 삶을 살아낸 한 생명에 대한 경의의 표시인 것이다. 한 인간의 인생역전은 산자들 자신의 삶을 비쳐보게 하는 거울이 되고 간접 교훈을 남겨주기도 한다. 복잡한 찻길을 가다가도 까만 깃발을 달고 천천히 움직이는 장례행렬을 만나면 길가에 비켜서야 되는 것은 떠나는 분에 대한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알던 모르던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 공통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예절인 것이다. 


이 박사는 생전이별 식후 6개월을 더 살았다. 그의 장례식엔 십 여 명 가족 친지뿐이었다. 어쩌면 가장 외롭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시간, 친구가 가장 필요한 그 시간에 혼자가 아니었을까. 문득 내 손 잡은 단단한 손은 놓을 손이 아니라 붙잡아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호소처럼 전해왔다.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태에 개인의 자존심이나 인간의 존엄성은 본연의 사랑으로 엮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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