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hokim
김종호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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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우리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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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우리 밥상

 

 우리가 자랄 때는 시골에서 어지간히 잘 사는 부농이어도 평소에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을 수 없었다. 언제나 감자, 보리와 잡곡을 섞어서 먹었는데 특히 초봄쯤 되면 쌀이 떨어지고 완전히 보리밥만 먹게 되는데 보리가 떨어진 사람들도 있어 그 당시 보리밥만 먹을 수 있어도 불행중 다행한 사람들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을 하지 못하겠지만 이때를 우리는 보릿고개라 불렀다. 


 우리는 땅도 작고 지하자원도 없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빈번한 수탈과 전쟁으로 숙명인 양 보릿고개를 숱하게 겪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이른 봄의 새파란 보리밭에서 종달새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떨어뜨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보릿고개라는 절량의 쓰라린 체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바보가 될 정도로 진부한 넋두리가 되었다. 이런 시절에는 쌀밥과 반찬 타령은 도회지의 부잣집 자식들이나 하는 것이지 시골의 어린이들에겐 들어 보지 못한 말들이다.


 명절이나 제사때나 또는 특별한 날일 때에야 쌀밥과 생선종류를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조금 유식한 말로 생선이라고 했지만 이건 현대적인 표현이고 우리 어릴 때는 생선을 고기 또는 괴기라 불렀다. 고기라고 해야 어머님이 오직 자식들을 위해 시골 장날이나 나오는 갈치나 고등어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하여 온갖 노력으로 희생과 사랑을 있는 대로 퍼붓는다. 대개 인간관계란 내가 제공한 만큼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경우가 많으나,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헌신적 희생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뿌리와 속성을 모르고 자랐다.


 우리 동네는 산골 농촌이라 반찬은 주로 산나물과 날된장을 많이 먹는데 운좋은 날은 밥상에 마늘장아찌나 새우젓, 멸치, 날된장 풋고추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나온다. 1년에 한 번씩 여름철에는 값이 많이 나가지 않는 개를 잡아 (그래서 “개값”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온 식구가 포식하곤 했는데 물고기인 생선도 먹었지만 이것이 유일하게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취하는 동물성 단백질이었다. 세월이 흘러 50여 년 전 군대에 갔을 때도 나의 기억으로 1주일에 한번씩 소고기 국이 나오는데 졸병 차례까지 오다보면 마치 소가 목욕을 하고 지나간 것처럼 기름기만 떠있는 멀건 국물만 돌아오는 것이다.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내가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한때 “박양”이라고 불리던 아내와 결혼을 하고 부터였다고 하겠는데, 여기서 박씨의 제현께는 양해를 구하는 바이거니와 비교적 활달한 편인 아내의 성격이 좀 급하고 손이 큰 편인데 어릴 때 한국에서 못 먹었던 고기를 소급해서 먹어온 것이나 다름없을 게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집에는 아들 녀석 둘을 얻었는데 건강하게 자라 가정을 꾸미고 잘살고 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의 자라는 과정에서 좋은 점은 모두 아내를 닮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모두 나를 닮았다고 하며, 요즘은 여성상위 시대라 딸들이 아들녀석들보다 부모에게 잘하는데 딸 없는 것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니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이 억울함을 하소연 할 곳이 없다. 특히 손자 손녀들에게는 사랑의 정도가 조금 헤퍼 나의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는 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몬트리얼에서 오랫동안 살다 이주해 온 대학동창 정 선생이 살고 있다. 등산도 같이 가고 골프도 같이 하고 가깝게 지내고 있다. 지난 주에 우리 내외를 집으로 저녁초대를 했다. 정 선생은 손재주가 특별해서 컴퓨터나 현대기기를 모두 다룰 줄 알며 심지어 영화도 만든다고 한다. 손재주가 없는 내가 배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의 아내 Mrs.정은 가까운 친척을 만난 것처럼 너무나 자상하고 친절했다. 


 그날 우리가 특별한 손님이었는지 밥상위에 적당히 소금 뿌려서 구운 통째로 올라 있는 생선 ‘조기’의 크기를 보고 놀랐다. 가끔 식당에서 우리 손바닥 반 정도의 작은 조기는 보았지만 이렇게 큰 조기는 처음 보았다. 너무 큰 생선이라 나누어 먹자고 했더니 안 된단다. 그것도 한사람 한마리씩 먹어야 된단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진수성찬이고 과분한 대접이었다. 우리가 시골에서 자랄 때는 이런 조기를 먹어보거나 조기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귀한 것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어떤 글에서 읽었는데 조기에 대한 어떤 구두쇠의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짜디짠 조기 한 마리를 방 앞에 걸어 놓고 밥 한술 입에 넣고 조기를 쳐다보고 한술 뜨고 또 쳐다보고 해서 반찬을 했다는 것이다. 구두쇠의 아이가 밥 한술 떠 넣고 두 번 쳐다보니 벼락을 쳤다는 것이다. “너무 짤라! 짜게 먹으면 물켠다!” 이건 물론 과장된 유머지만 아무튼 짜게 소금절인 조그마한 조기 자반 한 마리면 대식구 한 끼 반찬이 충분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을 것이다.


 정 선생집 초대를 받고 온 바로 다음날 아내는 놀랄 만큼 큰 사이즈의 귀한 조기를 한 상자도 아니고 두 상자를 사왔다. 하기야 세월이 변해 요즘은 무엇이든지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풍요의 소비 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님이 보릿고개를 체험할 만큼 어렵게 살아 손이 크고 씀씀이도 헤픈 편인 며느리를 보신다면 기절초풍 할 것이지만 우리집의 달라진 밥상을 보시면 그리 탓만 하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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