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hokim
김종호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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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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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길

 

 

 인간은 모두가 다 나그네인데 이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존재가 인간인지도 모른다. 집을 떠나 길에 나서면 누구나 나그네가 되는데, 이제는 옛날처럼 정감어린 길이 그만큼 없기에 나그네도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나그네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일정 공간을 거닐며 살다가는 그 공간을 자신의 소유로 차지하고 싶은 충동적 생명체이기도 하다. 길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움이란 외로움에서 비롯되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인생에서 사랑은 필수조건이다. 그러므로 그리움은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어디론지 대상을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리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으면 꿈과 희망을 키워 왔던 내 고향의 지난날이 어제 일처럼 올올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집 뒤 산위에 올라서서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던 어린시절이 있었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빛나던 수평선의 끝, 먼 바다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상상으로 이어진다. 어린 마음속에도 먼 바다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그리움을 읊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불과 몇 해 전, 고향으로 가는 옛날 신작로는 흙먼지 풀썩이던 꼬부랑길 자갈길이었는데 지금은 물론 포장도로로 변했으나 도시를 벗어나 얼마쯤 가자 정겨운 흙길이 뻗어 있었다. 아스라이 먼 산이 오히려 가깝고, 길가의 작은 도랑에서는 풀빛, 모래 빛이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땅의 산은 저만치 먼 곳에 홀로 있지 않고, 이 고장의 사람들은 이곳에 외로이 홀로 떨어져 살고 있지 않다. 산도 사람들도 여기, 이곳에 어울려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산이 내 안에 있는지 바다가 우리 안에 있는지, 산이 나를 품고 있는지 바다가 우리를 안고 있는지, 이것이 이 땅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서 조용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강산의 자연의 숨결과 사람들의 삶이 순하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웅장한 황홀함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섬세함의 비경이다. 이는 한국의 산과 강과 바다의 개성이요 독특함이다.


 아주 먼 옛날 고향에서 살던 날들에 나를 스쳐간 물상들이 머리 곳곳에서 되살아났다. 그것들은 순한 눈을 가진 우리집 소, 까치, 갈매기, 까마귀, 참새, 제비같이 가까운 동물에서부터 집 뒤 대나무밭과 빨간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등으로 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물줄기들과 산언덕들의 내 영토가 있었다. 하기야 내가 그곳을 떠난 다음에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곳에 관한 한 나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그 언덕으로 가는 길은 논밭이 양옆으로 펼쳐지고 멀리 산모퉁이에 당산나무 높이 솟아 있는 곳, 풀 냄새, 흙 냄새에 하늘을 맞는 고향의 언덕이다. 오래 그리워하고 오래 기다려온 마음을 비로소 품어 안는 나의 사랑하는 고향, 그날 나는 마음에 두었던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지만 그곳에 간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내 고향 언저리의 시골길을 내가 걸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도랑이 모인 개울에는 비록 징검다리도 없고 외나무다리도 없었으나 나는 내 마음속에 그 풍경들이 아로새겨져 옛 모습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가을의 아름다운 날이 생각난다. 언제였던가, 통학열차가 바닷가를 지나가다가 멈추는 간이역에는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피어 있고, 빨간 유홍초 꽃이 덩굴 위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었다. 햇빛은 아직 눈부셨다. 시커먼 화차들이 가을의 눈부신 햇빛 속에도 어딘가 어둠이 실려 오고 있다고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그 시골 간이역들이 바닷가를 품고 있었는데 지금은 천지개벽을 한 빌딩숲으로 완전히 변해버린 새로운 곳으로 그 옛날 고향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다. 세월이 이리도 빠른가, 참으로 초고속으로 달려온 특급열차처럼 그 숱한 나날의 작은 간이역들을 쉬지도 않고 지나쳐 어느덧 종점을 향해 가는 가을의 한 고갯길에서 길고 지친 기적을 울리고 있는 계절의 뒷모습을 본다. 


 굳이 새겨보면 지나간 세월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어디에선가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잘못 살아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환상과 열기에 들떠서 피지 못할 꽃을 피우려고 애쓰고, 지는 해를 멈추게 하려는 듯 늙어가는 모습을 애써 감추고 화려하게 치장하며 떨어지는 잎을 가지에 붙들어 매는 심정으로 초조하게 살지는 않았던가. 문득 되돌아보고 뉘우치고 감추어진 속살을 본 듯 부끄러워지는 마음, 그것도 세월이 주는 성찰이리라.


 고향으로 가는 길, 그 길은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공룡들이나 오갔을 그런 무렵부터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며 여기까지 이어져온 길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 길이 점점 멀어지고 이제 끊어지고 있다. 옛날 알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이별이라는 말만 남은 풍경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이별을 고한 지 어언 수십 년, 그러나 아득한 곳에서 우리는 다시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난 사람 어김없이 헤어지며, 살아 있는 우리 어김없이 죽는다는 말을 누가 굳이 하고 있는가. 인간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시간의 한계와 거리의 제약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다. 나그네의 길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고 있고 그 만남 가운데 이미 떠남이 깃들여 있다고 누가 굳이 일깨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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