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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사역과 기도(54)
jinkyukim

(지난 호에 이어)

주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겐 빵(식량)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정직하게 계약된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행하고, 자기가 해를 입어도 결정된 바를 변경하지 않는 인격체의 성도들은 그들의 법칙은 대접 받은 대로가 아니라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겸손한 성도는 선하다고 말을 다시 듣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신앙과 자선은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지만 우리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마저 그러한 신앙과 자선을 위하여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자!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벌써 믿음을 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딤전5:8).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겸손한 근면을 축복해 준다는 것을 알자! 남을 부당하고 불친절히 대우하는 자들은, 주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선한 피해자들을 보상해 주실 것이며 하나님께 자기들의 사정을 정직하게 아뢰는 자들에게는,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품삯을 지불하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직업 이든지, 근면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재능을 발휘하여 모든 합법적 기술과 비밀을 다하여 봉사하면 성공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실 인간이란 자기의 직업이나 기능을 통해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닌가?

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비록 어떤 계약에서 작은 몫 밖에 갖지 못하고 출발을 했더라도, 겸손하고 정직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근면하면 마침내는 커다란 풍요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주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큰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타인의 몫이 될 것에 충성을 다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몫도 풍성히 받게 되리라. 정직하고 올바르게 주인을 섬겼던 종<야곱>은 마침내 부유한 주인이 된 것이다(창30:37-43).

비록 우리의 친척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우리에게 다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의 형편을 친구들이 알도록 하고 그들의 형편을 물어 알아 두는 것이 우정과 형제애의 하나이다.

예의 바른 행동은 반목을 없애준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부당하게 성을 낸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유순한 태도로 말할 것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사정을 보다 호전시키기 위하여 화해를 간구하거나 화평의 권리를 간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그 품은 마음이 오래간다. 그래서 자극이 주어지면 그것이 폭력의 기회를 찾는다. 즉 사람들은 노(怒)하기 잘하고 그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

우리는 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자연적인 신앙의 깨달음과 <계시>된 신앙의 깨달음에 의하여 함께 인도되고 지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남들을 압제할 수 있을만한 대단한 영적 능력의 힘을 가진 사역자들이라도, 자신을 억누를 만한 힘은 좀처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큰 영적인 힘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근원을 감찰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인간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횡포와 압제, 온갖 향락과 방종이 그 인간 본성의 부패에서 흘러 나왔다. 즉 마음이 거짓되고 절망적일 만큼 사악해졌다.

세상 도의는 부패하였고, 습성과 성질도 악해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인색하여 돈만 바라는 것으로 보이거나, 탐욕과 독선적 기미를 보이는 일을 행할까 조심해야 한다.

천박한 노예 근성을 가진<영>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게 되고 위로함을 받게 되면, 오만하고 무례해지기 쉬우며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잊기 쉽다는 것을 주목하자(잠29:21).

명예를 올바로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미 급한 자들이 흔히 자기가 죄책을 지고 비난 받아야 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투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교만과 노여움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격정이 극에 이르게 되면, 이성을 잃게 되어 남의 말을 듣거나 자기의 말을 이야기 할 수도 없게 된다.

주 하나님께 소란스럽고 성급하게 호소하는 자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경솔하고도 대담한 악담이 흔히는 죄와 악한 마음을 품은 증거가 된다.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사랑이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변함 없었음을 알 수 있다(창16:4-6).

화평과 사랑을 간직하고자 하는 자는 심한 비난에 대해서도 온순한 대답으로 응해야 함을 기억해 두자. <양보>한다는 것은 큰 노여움을 진정시킨다. 이것이 악을 치료하는 법 이기도 하다.

한 나라를 지배하는 최고 통치자의 악행은 곧 그 나라의 수치가 될 것이고 통치자가 악을 억압하고 덕의 옹호를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통치자의 권세요, 도리임을 알자!

그런 자의 아래에는 결코 욕된 신하(조력자)가 발 붙일 수 없고 슬기로운 신하만이 큰 옹호자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우리 자신을 주 하나님의<의>로 가리지 아니하고는 두려워서 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이것만이 <증거>의 갑옷이 되며, 우리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덮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그분 앞에 나아가도록 하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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