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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점심
jakim

 

 올 5월 들어 날씨가 무척 나쁘다. 비가 거의 매일 내리다 시피하고 날씨가 춥기까지 하다. 오늘은 겨울 코트까지 꺼내 입어야 했다. 퀘벡에서는 홍수로 집들이 침수되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강릉에서는 대규모 산불이 나 많은 집들을 태우고, 주민들은 대피했다고 한다. 살기가 만만치 않은 건가?


 올 어머니날은 어머니의 12주 기일과 맞물려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벌써 12년이 흘렀다. 잠깐 동안에 지나간 그 세월이 두번 더 지나면 내가 어머니의 돌아가신 연세와 같고,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없을지는 하나님께서 결정 하실 것이니 난 그저 열심히 살아가면 되겠다.


 이틀 전 집사람과 TV를 보다가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한마디 한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어머니 없이 12년을 살아왔어요?” “ 어, 그러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렇다, 나는 마마스 보이였다. 이것저것 어머니와 상의하고, 아프면 어머니가 오셔서 먹을 걸 해주시고 만져주셔야 몸이 나았던 그런 마마스보이. 나이 오십에도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몰락하는 양반집의 막내딸로 태어나 나이 여섯 살에 고아가 되신 어머니,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가 어린 자식 여섯명을 남겨놓고 나이 사십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낸 어머니, 그때 위의 세 누나는 좀 컸지만, 넷째 딸이 아홉 살, 시원찮은 아들이 여섯 살, 막내딸이 세살. 삼년 후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던 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흑백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서울역, 남대문, 전차 그리고 산동네.


 서울에서의 팍팍한 생활, 그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하신 어머니. 어렵게 살았지만 굶어본 기억은 없다. 행상, 노동, 보험세일즈 등을 하시면서 정말 열심히 사셨다. 결혼 후 얼마 안돼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자 “너희들이 이렇게 사는 게 뭐가 힘드니, 나는 손으로 밥해가며 빨래해가며 돈까지 벌어가며 너희를 굶기지 않으며 키웠다.” 그 후론 어머니 앞에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중학교 다닐 때였다. 어머니가 십장으로 여러 아주머니들을 인솔해 도끼다시라는 일을 하실 때였다. 그날이 학교를 안가는 날이었는지 나에게 집에 준비해 놓은 점심을 시간 맞춰 가져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연장을 가져가시느라 손이 모자라셨겠지. 점심을 싸들고 그 집 앞에까지 갔다가, 노동을 하는 어머니가 창피해서 차마 그 집을 들어가질 못하고 집으로 그냥 왔다. 일을 끝내고 오신 어머니에게 호되게 혼난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머니에게 혼난 것만 서운했는데, 나이가 들어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다보면 가끔은 그때 그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얼마나 배고프셨을까 또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께 얼마나 미안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때 그 일을 사과해야지 하다가도 어머니 앞에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잘못한 일이 무수히 있지만 그 일처럼 어머니에게 미안한 일이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 말씀을 못 드렸는데, 몇달 전 어머니 납골당 앞에서 그 말씀을 드리고 사과를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몇 분 동안 옛일을 회상하며 울고 왔다. 속이 조금은 후련했다. 


 나는 안다. 어머니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거다. 내가 속을 그렇게 썩여도 효자라고 자랑하신 어머니이니까. 섭섭한 것은 다 잊으시고 조그만 선물이나 용돈을 드리면 많은 사람에게 자랑을 하신 어머니 이니까. 연금도 용돈도 다 모으셨다가 목돈이 되면 아들에게 주신 어머니이니까. 


 돌아오는 어머니날엔 딸네랑 같이 어머니를 모신 곳에 가서 곧 태어날 증손녀를 보여드려야겠다. 엄마 며칠만 더 기다리세요. 그날은 제발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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