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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부동산캐나다 칼럼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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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감(質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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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음악, 영화, 문학 등 예술에 관하여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는 알고 있다. 때론 자주 듣고 보고 읽기 때문에 좋아지기도 하고, 환경이 나로 하여금 이를 가능케 해 주기도 한다. 예술은 지적인 활동이기도 하지만 이를 승화시키는 것은 감성의 터치가 있는 곳에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보로 30분 내외로 갈 수 있는 우리 동네엔 토론토예술센터도 있고 시네플렉스 영화관이 있는 쉐퍼드 센터도 있다. The Metropolitan Opera 안내 책자엔 Cineplex 극장에서 오페라나 발레 등의 무대공연을 HD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잡지에 소개되고 있다. 


 무대에 올려진 라이브 작품을 관람하기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입장료와 공연장을 찾아갈만큼 여유로움도 없기에 비교적 저렴한 티켓과 우리 집에서 남편과 함께 운동 삼아 걸어갈 수 있는 적격의 장소로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 나서곤 한다. 


 한겨울 토요일 오후 몇몇의 글벗과 함께 독일이 낳은 불멸의 작가 괴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를 무대에 올린 작품을 영상으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당일 표 구입이 가능할 거라 여겨 30분 전에 박스오피스로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사진이다. 운 좋게도 친구의 표와 함께 두 장 구입에 성공했다. 4시간짜리다. 중간 중간 휴식시간이 있으나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음악, 무용, 연극, 회화가 총동원된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수준 높은 예술로 결코 일반대중은 다가가기 어려운 장르란 부담과 편견이 있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년 전 부터인가, 인근 극장에서 이미 무대에 올려졌던 음악회나 발레 또는 오페라를 영상으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파우스트도 이중 한 작품이나 가장 인상적이고 감명 깊이 몰입되었던 오페라였다. 


 만일 이를 라이브 오페라로 감상했더라면 난해하여 부담스러웠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장엄한 TV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들어왔다. 프랑스어로 불려졌던 파우스트 줄거리가 노래와 함께 영문 자막이 올라와 있어 그 흐름을 따라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주인공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트와 내기를 하며 펼쳐지는 장엄한 인생 이야기 자체였다. 


 인간의 목소리는 악기 중에 최상의 것이라 했다. 오페라의 매력 중 하나는 작품을 소화시키는 성악가들의 가창력과 연기다. 배경 음악 오케스트라 연주 역시 마음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이날 파우스트를 감상하기 위해 찾아온 관객의 대부분은 백인 노인들이었다. 유럽문화와 옷에 익숙해 있는 서양 노인들의 고상한 취미와 품위 있는 매너는 수백 년을 거쳐 오는 동안 몸에 배어 있나 보다. 모두 우아해 보였다. 그들의 삶의 넉넉한(?) 질감은 은퇴 이후 생활의 여유로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자존감(respect)이 생기려면 의식주는 최소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절실히 느낀 정치가는 트루도 수상을 제일로 꼽는다 했다. 40대 초반, 정치 입문에 나서기 전 퀘벡 분리주의를 옹호했던 그가 동남아 일대를 여행하면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다 한다. 후진국일수록 자기들끼리 더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존감의 전제는 최소한 국가에서 의식주는 감당해 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귀환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를 옹호하는 인권변호사로 나섰고 이로 인해서 퀘벡이 캐나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분리주의자에서 연방주의(Federalism)자로 탈바꿈한 동기가 되었다 한다. 


 그동안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보람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긴 세월 지나놓고 보니 그나마도 결과적으로는 남을 돕는다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었다는 자각이 생긴다. 삶의 질감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을 가꾸며 사는 사람들, 문화 예술은 바로 우리 속내를 보다 알차게 해주는 내용이라는 것을 깨달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문명과 문화 수준의 격차가 적은 나라, 균형 잡힌 나라 백성은 그래서 더 행복한지 모른다.


 가난에 허덕이던 모국을 뒤로 하고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것은 1970년대 초엽이다. 정착에 필요한 영어를 배우는 동안 일용할 양식을 캐나다 국가에서 책임지어 주었던 것도 트루도 수상 집권 시절이었다. 그러나 빵 문제가 해결되니 정신적인 빈곤이 기습해 왔었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은퇴 이후 삶의 질을 높이며 그 질감(質感)을 의식하며 살고 싶은 여유로움도 따지고 보면 의식주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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