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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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표정 더듬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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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TV에서 유명 인사와 인터뷰를 하며 생애(生涯)에서 가장 좋았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볼 때면 과연 나는 어떠했나 돌아보게 된다. 


 돌아가고 싶은 좋았던 시절이 있었는가 생각에 잠기다 보니, 살아 온 세월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가 보고 싶다면 남편과 ‘연애’ 하던 그 시절이 아닐까 싶다. 


 남편을 71년도에 만나서 사망하던 2017년도까지 함께 살았으니 46년이란 세월이 된다. 그럼에도 특별히 생각나고 기억에 남는 표정이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남는 건 사진 뿐'이란 말을 증명이나 하듯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남편을 대학 3학년 때 만나 과 단합대회라며 학교 앞 음식점에서 모여 앉았다. 과원이라야 여학생이 5명, 남학생도 15명은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식당에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얘기들을 나누며 난 편입생이었기에 자기소개를 했던 것 같다. 


 그 후 종로의 어느 낙지 집에 모였던 일, 무엇보다 남편, 나, 친구 셋이서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었던 라면 맛은 그 후 몇 번씩 되뇌곤 했다. 그 라면 집이 유명했던 것은 라면에 고추 가루를 살짝 넣고 단무지를 주었는데 그 시절엔 그 라면을 참 맛있게 먹었다. 


 3학년 때 답사 차 갔던 장소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남편이 여학생 몇 명과 가운데서 어깨동무를 하듯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사진을 볼 때면 좋다던 여학생들 틈에 끼여 기분이 참 좋았던 모양이네 하고 상기하곤 한다. 


 사실 '표정 더듬기'란 살아온 날의 흔적, 모습이 될 것이다. 우리 그 시절 학교 다닐 때는 미래에 대한 생각, 걱정도 없지 않았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남편 역시도 학교생활, 즉 강의 듣고 친구들을 만나면 당구도 한 게임 치고, 가끔은 술자리도 만들고, 우린 학교가 끝나면 을지로에 있는 호수 다방, 명동, 종로, 동대문에 있는 다방 등을 다니며 차 마시고, 밥 먹고, 가끔은 볼링장, 맥주, 소주도 마시고, 영화 구경도 하면서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거칠 것, 걱정 없이 2년은 흘러갔다. 하지만 졸업을 하면서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졸업과 동시에 춘천에 있는 여자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하지만 2주를 끝으로 다시 올라 왔다. 그곳에 있다 보니 '교사'가 천직이 되겠다, 라며 더 큰 꿈을 위해 포기하고 올라 왔다고 했다. 


 그 후 군대 문제는 방위로 마쳤지만 직장문제는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우선은 생활대책으로 택시를 한 대 사서 운영을 하면서 우린 결혼을 했다.


 그 후 사업에 두 번 실패를 하고 80년도에 제일제당 백설햄 대리점을 하게 되면서 88년도에 제일제당 냉동 대리점, 동원 산업 대리점을 운영하다가 92년도에 이민을 왔다. 


 돌아보면 나나 남편에겐 그 시기가 가장 편안하고 여유 있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그 당시 남편의 얼굴은 별다른 고민 없는 모습이었다. 남편은 3남 2녀의 막내였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다지만 14살 위인 생활력 강한 형님 덕분에 별다른 고생 없이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결혼할 당시 집도 아주버님 것이었고 우리가 결혼을 한 후에도 몇 번 사업자금까지 대 주셨다. 그러니 그런 아주버님이 살고 계셨던 이곳 캐나다로 오는 것이었으니, 남편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보다 아주버님이 계셨기에 이민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민 온 지 4년, 도넛가게 시작하고 3년 만에 파산선고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런 와중에 난 사는 게 너무 무섭고 숨이 막힐 것 같다며 남편이나 딸들의 심정을 헤아릴 만큼의 여유도 없이 서울행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언제는 내가 돈을 벌어서 살았느냐며 들어오는 길에 친정 엄마까지 모시고 왔으니 남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친정 엄마가 보기엔 잘 살겠다고, 더 나은 삶을 찾아 친정, 처가 식구들의 안위는 아랑곳 않고 훌훌 털듯 떨치고 떠나더니 고작 몇 년 만에 ‘그런 꼴’인가 싶은 마음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모습을 장모한테 보여야 하는 남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새삼 돌아보니 너무 미안하고, 나 밖에 모르는 여자였나 싶어 정말 미안하다. 내 식구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응분의 대가는 지금까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나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작은 딸은 아직도 내게 대한 마음이 곱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업에 실패를 하고 아이들(큰 딸은 고3, 작은 딸은 중3)이 그 나이에 더 힘들고 겁이 났을 텐데, 아빠나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고 엄마 혼자 살겠다고 한국엘 나가더니 이번엔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왔으니 말이다. 


외할머니가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형편도 아닌데, 더 이상 비참한 모습은 보일 수 없을 그런 현실을 장모, 외할머니한테 노출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해 얼마나 밉고 싫었을까. 


또 그뿐이면 이해도 하겠지만, 그 후 글쓰기를 하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걸 들고 책을 내겠다고 서울을 나가겠다고 하니 아무리 엄마라 해도 정말 싫었을 것 같다. 


“무슨 돈으로 책을 낼 것이냐”고 한심스러워 묻는 작은 딸에게, “그건 네가 걱정할 일도 아니고 땅을 팔아서라도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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