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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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딱해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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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어릴 때이니 내 나이 30대 초반쯤이었으리라. 언제부터인가 시장엘 나가면 이리저리 돌아보곤 하는데 시장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한 연민과 옛날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이 꾀죄죄하니 지쳐 보이는데다가 딸만 다섯인가 한다는 시장통의 공주 엄마는 내 마음을 가장 아리게 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시장을 나가면 그 엄마가 으레 눈에 띄곤 하는데 나는 늘 저런 야채 정도 팔아서 저 아이들 공부시키며 살 수 있을까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장사를 나왔으니 식구들 아침은 어떻게 하고 아이들 도시락은 싸서 보낼 수가 있을까 시선이 머물곤 하였다. 


그러면 교복을 입은 딸들이 돈을 달라고 했는지 앞치마처럼 두른 누런 전대에서 돈을 꺼내 주며 밥은 먹었느냐, 도시락은 쌌느냐며 돈을 좀 아껴서 쓰라는 듯 그런 표정으로 보였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보며 오래 전의 아버지 모습이 느껴져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 옛날 아버지가 서울로 와서 쌀가게를 하시며 물건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파왔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 7남매 교육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작은 아버지의 잦은 사고로 해서 아버지는 홧김에 서울로 몽땅 올라오신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자리도 잡혔겠다 그런 소매상쯤은 하지 않아도 내로라하고 사셨던 양반이 크지도 않은 체구와 키에 가게 방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쓸쓸하고 아파올 때가 있었다. 


 처음엔 가게를 하며 삼륜차까지 몇 대 가지고 했는데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니 학비 때문이었는지 차츰 차는 팔고 가게만 하다가 옆집의 방앗간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중에는 가게와 방앗간을 같이 하시게 되었다. 


 처음엔 물건도 많이 쌓여 있곤 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해가 갈수록 가게가 빈약해 보였다. 난 이따금씩 쌀 한 가마 팔면 얼마나 남을까, 하루에 몇 가마 정도나 팔아야 우리 식구가 먹고 살 수 있으려나 가늠해 보곤 하였다. 


아침이면 언니부터 시작해서 동생들까지 학교에 가면서 돈을 타 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남는데 저 돈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난 슬그머니 그냥 나가곤 하던 때도 있었다. 


 그랬기에 결혼을 해서 살면서 동네의 그것도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서, 슈퍼를 하는 자그마한 키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그들에게서 수시로 아버지의 고충을 유추해 보곤 했던 것이다. 


 그 후로 난 이따금씩 내가 저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뭐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기도를 하면 되겠다 싶어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성당에 가기로 작정하고 교리 반에 등록을 하였다. 


 처음엔 마귀가 시험을 한다더니 내게 해당이라도 된 듯 시작하고 몇 번 나갔는데 꼭 성당을 나갈 시간만 되면 일이 생겨 그것도 4주가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동네에서 나보다 몇 살이나 아래쯤 되는 새댁이 나를 보더니 “참 딱해요.”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나와 같이 교리를 시작했던 사람이었고 그때는 이미 그 여자는 영세를 받았을 때쯤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무슨 얘기냐고 물어 보지도 못하고, 난 어이가 없어 벙벙하니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그 여자가 내게 했던 ‘참 딱해요.’하던 말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동네에서 지나며 우리 큰 딸아이 옷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아무 소리도 없이 목 뒤를 제치고 상표를 살며시 까보기도 하였다. 그녀가 보기에 아이의 옷이 예쁘게 보였던 모양이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어 얼굴만 기억할 뿐 말 한 번 나눠본 적도 없는, 자세히는 알 수 없는 동네의 새댁이었다. 


 난 처음 내 취지와는 달리 그들을 위해서 올바르게 기도 한 번 못해 보고 이따금 생각이 나면 ‘장사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며 마음속으로 염원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딱한 일이 생긴 것이다. 집 앞 골목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닭 집이 새로 생겼다. 언젠가 누가 왜 이 닭 장사를 시작했느냐고 물으니 먹고 살려고 했다는 그 엄마의 얼굴이나 그때의 옷차림까지도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50대 초반,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남편과 아들 둘은 가겟방에서 밥을 먹고 있었고, 앞에 두른 앞치마가 지저분했던 것은 닭을 잡다가, 손질하다가 수시로 손을 닦기 때문으로 보였다. 


 손님이 오면 닭장 안에 갇혀 있던 닭을 잡으려 손을 안으로 넣으면, 닭들은 서로 잡히지 않으려 좁은 닭장 안을 꼬꼬댁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치듯 하던 닭을 용케도 한 마리 잡아, 칼로 푹 찔러서 뜨거운 물로 데쳐서 털을 뽑은 다음 토막을 원하면 툭툭 쳐서 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장면을 지켜보며 난 너무 가슴도 떨리고 그 아줌마가 안쓰러워 보였다. 왜 닭 장사를 했느냐고 물어 봤던 엄마도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나와 같은 심정이어서 그 엄마가 안 되어 보여 물어봤을 것 같다. 그야말로 닭고기는 먹을 수 없으리라 싶게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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