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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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나오지 않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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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떠나기 전 날, 집엘 들어가니 TV와 컴퓨터 모니터까지 켜 놓고 있었다. 난 순간 뭐 그렇게 보고 싶은 게 많아서 두 군데씩 켜 놓고 있느냐고 모니터는 끄자고 했다. 
 그 밤에 밥까지 먹고 거의 새벽 3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나마도 그 다음 날 도매상을 가야 하니 빨리 자라는 내 성화에 못 이겨 잠자리에 든 것이었다.


 그런데, 새벽에 평소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는 다르게 심하게 ‘크르릉 크르릉’ 하기에 평소 코도 많이 골지 않았지만 자다가 코를 골면 한두 번 기다렸다가 “무슨 코를 그렇게 골아요? 하면, ‘내가 그랬어’ 하고는 이내 잠잠해진다. 


 그 날도 조금만 기다려 볼까 하다가, 그 괴상한 코 고는 소리에 무슨 코를 그렇게 고느냐고 하며 불을 켜니, 남편 오른 쪽 팔이 침대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순간 놀라기도 불길해서 남편을 살펴보니 정말 이상했다. 


 난 너무 놀라 “여보, 왜 이래”를 외치며 심폐소생술 인공호흡을 몇 번 하다가, 떨리는 손으로 큰딸한테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작은 사위한테 전화를 하니 그 시각에 사위의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상황을 대충 설명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싶었는데 뒤미처 딸 사위들과 구급대원들이 왔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오며 나보고 나가 있으라고 해서 우린 아이들과 같이 거실로 내려왔다. 


 병원까지 가지도 못하고 이승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그 사이 검시의(檢屍醫)가 와서 남편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의사가 시신 부검을 하겠느냐고 묻기에 괜찮다고 했다. 사망진단서엔 ‘심장질환으로 인한 돌연사’로 판명이 났다. 


 우리가 거실에 그러고 있는 사이 벌써 남편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백인 구급대원 2명에 의해 집을 나서고 있었다. 이렇게도 황망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전날까지도 아무런 증상 없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사이 안녕’이라더니 나의 남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평소에 친정 엄마가 기도 제목 첫 번째가 ‘잠자다가 자는 듯이 가는 것’이라고 노래 삼아 하시더니 정말 엄마의 소망처럼 그렇게 자다가 죽기도 하는 거였다. 그 경황 중에 장의사로 연락을 해서 2시 반에 약속을 했다. 이미 간 사람은 갔다 해도 당장 가게 문을 열어야 하니 그것도 너무도 막막했다. 


 딸들은 그 날 하루 가게 문을 닫자고 했지만, 산 사람은 일 처리를 하면서도 일상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장의사에 약속을 정해 놓고 학교 후배한테 전화를 거니 2시쯤에 가게를 나올 수 있다 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가게로 갔다. 


 우리 대신 가게를 봐 주기로 하고 나온 후배한테도 차마 남편의 ‘사망’에 관해 말 할 수 없었다. 아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만 했다. 


 그런 와중에 가게 문을 열고 후배한테 맡겨 두고 딸과 같이 장의사로 갔다. 장례날짜와 일정 등의 상의를 끝내고 아무한테도 연락을 안 할 수도 없어 남편 학교 선배이자 골프를 같이 다녔던 심 선배님한테 전화를 했다. 


 누구인들 놀라지 않을까. 그 선배님이야말로 그 전날 가게엘 들르셨다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울먹였다. 


 다시 내게 전화를 해 뭐 도와 줄 것이 없느냐고 목사라도 소개시켜 주겠다고, 지인들한테 연락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기에, 목사님 소개 안 시켜 줘도 되고, 누구한테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그랬지만 남편 역시도 평소에 교회나 성당엘 나가지 않았는데, 남편이 갑자기 사망을 했다고 종교의식을 빌어 장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식구끼리 조용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의 선후배 여러 분이 장례식에 기꺼이 참석해 주시어 아주 외롭지 않게 조촐하면서 편안하게 난, 그렇게 남편과 영원한 이별을 했다. 


 장례식을 치렀음에도 누구한테도 남편의 죽음, 사망에 관해 말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랬다. 어제까지 살아 있던, 평소 죽음에 관해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했던 사람인데, 남에게 뭐라고 말을 하나!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어요, 하늘나라로 갔어요, 패스 어웨이 어떤 말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의 사망에 관해 굳이 남, 타인에게 광고할 일도 아니어서 딸들에게도 아빠의 사망에 관해 가게 손님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딸들은 엄마가 왜 그렇게 해야 하나 조금은 의아하기도, 거부감이 이는 듯도 했으나 이내 알았다고 그렇게 하자고 해서 가게 손님들에겐 아직도 남편이 서울에 있는 걸로 되어 있다.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지도 어느덧 일 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난 서울에 있는 내 친정 식구에게도 아직 남편의 사망을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도 않고, 입을 빌어 얘기를 꺼내다 보면 어느 사이 눈물이 맺혀 오늘 내가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도 그 말을 삼킨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생명줄’을 놓는다면 과연, 숨을 거두는 본인이 이제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네 하고 알 사람이 있을까? 설령 알았다 한들 이승과 저승의 삶이 다른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도 어느 순간 남편처럼 그렇게 갈 수도 있네 싶으니,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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