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oonja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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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중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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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란 말을 한다. 이는 자식이 커갈수록 부모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이런 자식이든, 저런 자식이든 그래도 부모자식지간에 자주,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그래도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이민 오기 전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민을 가게 되었노라고 하며, 난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 데리고 ‘유학’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유학을 왜 보내느냐며 서울대학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난 서울대학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외국으로, 그것도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유학의 꿈을 아이들만 보낼 형편이 되지 않으니 나도 가고 싶다고 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 가서 먹고 살 것을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외국 사람들, 내가 가서 살게 될 캐나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더 궁금했다. 그래서 처음엔 영어교실(ELS)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외국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더 컸다. 


 처음에 만나게 된 영어교실 선생님은 존이라는, 지금 생각하니 나보다는 좀 어리게 보였으니 사십 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때 반에는 각국 사람들이 다 모였네 싶었다. 내 옆에 앉았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내 또래의 여자, 대만에서 온 여자 둘, 중국에서 온 여자, 일본에서 온 여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등 20명은 넘는 것 같았다.


 공부는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중간에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있었다. 처음엔 내 커피와 선생님 것만 준비를 해 가지고 갔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불편해 하며 같이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우린 그게 좋겠다며 찬성을 했고, 그래서 몇 명이서 돈을 조금씩 거둬 커피와 쿠키를 곁들여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다보니 수업 분위기도 그렇고 교실 분위기가 한결 훈훈해 졌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각자 음식 한 가지씩 만들어 와서 갖게 된 종강파티에 난 김밥, 다른 한국인 엄마는 초밥을 만들어 와서 너무 맛있게 먹었기에 잊을 수 없는데, 이란에서 왔다는 젊은 아가씨는 댄스 파티시간에 그들 특유의 복장을 입고 맨발로 춤을 얼마나 신바람 나게 추든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학기가 끝이 나고 난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갈비 잡채 등을 준비해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 후 대만 친구들과 선생님을 모시고 중국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초콜릿을 선물로 줘서 잊지 못한다. 캐나다 땅에 와서 일 년은 남의 인생살이 엿보려 그렇게 타국 사람들과 함께 하며 흘러갔다. 그때 대만에서 왔다는 사람은 아들이 대만에 있다고 했다. 


 그 다음엔 도넛 가게를 하게 되면서 남편이 내게 집에만 있으라고 했건만 난 궁금해서 밤에 나가서 일을 배워 손님에게 서빙을 하며 그렇게 캐나다 생활을 시작했었다.


 내가 하고자 했던 유학은 무슨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외국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내겐 유학을 온 목적이 되었다. 게다가 식구들과 같이 왔으니 기러기 가족이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4년 후 한국으로 다시 가야하나 기로에 섰을 때, 어떤 친구는 남편이 한국엘 갈 사정이면 아이들은 이곳에 두고 남편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딸들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딸들이 그때까지 미성년자였으니 난 당연히 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때까지도 딸들과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나가서 영어 강사를 할 때였다. 딸이 나가있기는 했어도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할 짬도 없이 바쁘기도 해 서울에 있는 큰딸이 잘 있겠지 하고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즈음 딸애 친구도 서울에 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 엄마는 딸과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한다며, 너희 엄마는 딸이 그렇게 나와 있는데 전화 한 번 하지 않느냐고 했던 말을 이제야 곱씹어본다.


 큰딸이 결혼을 해서 첫딸을 낳고 돌을 앞두고 시댁 어른이 있는 서울엘 4주간 다녀왔다. 그런데 평소엔 무심히 지났는데, 명절이 되니 한국에 있는 시댁 어른들이 손녀딸을 얼마나 보고 싶을까 싶어지니, 딸들을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 자주 볼 수 있음은 ‘복 중의 복’이란 생각이 솟구쳤다. 


 큰딸은 이곳 기후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서울엘 나가면 몸에 반점이 생기는 등 피부에 문제가 생겨 이곳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시댁 어른이 그곳에 계시기도 해서 언젠가는 나가서 살 마음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은 딸 역시 시부모님이 한국에 살고 계시기는 하나 딸과 사위는 나가서 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돈어른이 상견례 자리에서도 아들자식 잘 키워 처가에 ‘상납’한다는 말로 현재의 심정, 앞으로 아들 며느리를 자주 볼 수 없을 것임을 대변했다. 


 자식을 조기유학 보내기도, 어학연수 차, 근무여건상, 부부, 부모자식지간에 떨어져 살아야 하는 기러기 가족이 얼마나 많은데, 난 딸들과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그야말로 복 중의 대복이구나 싶다. 


 이산가족으로 인해 평생 보고 싶어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도 아직도 많은데, 딸자식 아들자식 잘 키워놨더니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들도 너무나 많고, 이민이란 형식으로 부모형제 등지고 살며 자칭 불효자식이란 꼬리표를 달고 사는 이들도 있고 보면, 글로벌 시대에 자식을 곁에 두고 사는 것도 말년에 ‘대복’이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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