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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들어선 문예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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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호

                      

“뭐?” “캐나다에서 한국문학 공부를 한다고?”

스무 해를 살아도 영어 때문에 갑갑했었는데, 은퇴 직후 마주친 <문예 교실> 수강생 모집공고는 반항적 아이디어같이 눈길을 끌었지요. 그런데 어색한 느낌이 먼저 든 것은, 글로써 나를 표현하거나 드러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독서 습관만은 한결 같아서, 중국 고전의 함축미와 웅숭깊은 감성미를 맛보려 애쓴 날도 있었습니다. 주류사회의 생각이 궁금해서 <토론토 스타>의 기사와 사설을 십여 년간이나 정독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활자를 통해야 세상 보기도 편하고 확실하게 느낍니다. 그러다, “글 쓰는 것이 학자. 언론인. 문필가만의 영역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애들은 나를 글, 책에 꽂힌 ‘활자 마니아’라고 놀립니다. 그들이 손안의 기기를 두드려 정보를 찾고 재바르게 활용하는 것은 부럽기도 하지요.

하지만 거북이도 나름의 비결은 있습니다. 아날로그 세대는 읽고 생각하고 느낀 감동이 머리와 가슴에 녹아 있습니다. 통신기기에 의존도를 높이는 신세대의 재간이 자기화된 지식이기보다, 혹시 남의 가치판단 체계를 슬쩍 빌려 쓴 건 아닐지 궁금합니다.

TV 프로그램이 사람의 혼을 빼앗고, 스마트 폰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 시절입니다. 내가 인생 말년에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글과의 씨름판에 뛰어들다니! 시대조류를 거스르는 느낌도 들고, 이런 선택이 옳은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래 관심을 뒀던 사회과학적 문체와는 다른 문학동네의 감성적 분위기에 적응 하기만도 내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 첫걸음은 서툴고 뒤뚱대지요. 내 느낌이 이러한데, 남의 눈엔 얼마나 어색해 보일까요?

젊었을 때 품었던 욕망을 하나씩 단념하고, 덜어내면서 가는 게 인생길이라지요. 해거름에 3모작을 시도하는 용기가 의미는 있지만, 쑥스러움만은 감출 길 없군요. 기존 회원들은 승용차로 달리는데 소달구지를 몰고 따라나선 것 같은 나는, 열등감도 생기고 작문이 힘들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문예 창작 교실의 수필 시간에만 배웠습니다. 선문답 같은 시는 초보자가 넘볼 경지가 아닌 듯했지요. 아마도 현실묘사에 치중하거나 논리적 표현에 길든 오랜 습성 탓일 겁니다. 난해한 현대 시는 못 배웠어도, 선비의 도포 자락 같은 전통 시의 멋은 나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수필 공부가 호락호락하진 않았습니다. 자조(自照)의 문학이라는 수필이 철학적 사유와 문학성의 바탕 위에 진실성과 겸손까지 요구한다니, 배울수록 어려움을 느낍니다. 좀 편하게 쓸 수도 있지만, 나까지 나서서 잡문 정도의 글로 세상의 소음에 보탠다면 무슨 뜻이 있으리오.

이 나이에 걸음마를 배운다니! ‘큰 노력과 자기희생을 요구할 문예의 길에, 그것도 막차에 올라서 얼마나 성과를 볼 수 있으려나?’라는 걱정이 떠나질 않았지요.

그럭저럭 한 해 동안 바친 열성 덕에 문학의 흉내쯤은 냈던 건지, 신춘문예의 말석에 겨우 이름은 올렸습니다. 그러고 반년을 더 배움의 교실에 남아서 문학 강의를 들으며 갈고 닦았습니다. 동시에 문인협회 수필 반에도 참여하여 창작 능력을 세련되게 다듬고 있습니다.

 문학 감성을 개발하고 언어의 조탁(彫琢) 능력을 키우는 배움은 나에게 소중한 기회입니다. 한국문학 선배들의 다양한 기량을 호흡하며, 글을 논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은 그대로 행복입니다. 문학적 기초가 박약한 내가 글동무들께 누가 될까 봐 늘 긴장하게 됩니다.

내 출발이 늦었으니 몇 배의 정열로 보조를 맞추어야지요.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쫓기듯이 많은 글을 토하지 않는 것은 제 작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적게 쓰더라도 뜻이 깊고 예술성을 지녀서 독자의 영혼에 공감과 울림을 주는 글을 발표하려 합니다. 살면서 받은 충격과 감동이 새겨 놓은 나만의 느낌과 의미를 불러내어 좋은 글로 나누고 싶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의 애환도 살피고 함께 사는 사회를 추구할 것입니다. 인간성에 반하는 현상이나, 무엇이든 기득권의 장벽을 치려고 하는 좁고 편향된 욕망을 지적하며 시시한 장애물 따위는 뛰어넘는 선들바람이 되려 합니다.

특히 한글로 풀어가는 작업이니, 내 감성의 옹달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할미꽃이 손짓하고 진달래가 흐드러지던 그 산천에 묻힌 뿌리와 민족문화의 물줄기를 이어준 시원(始原)의 은공을 가슴에 새겨 간직할 것입니다.

나름의 각오와 희망은 높고 분명하지만, 내게 허용된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던 오자서(伍子胥)의 탄식이 지금의 내 심정과 비슷했을까? 아서라, 소녀 같은 감상이나 변명 따윈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김소월은 예수님처럼 불과 서른세 해, 나도향은 스물다섯 살의 짧은 생애였어도 영원성을 지닌 그들의 문학작품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나 또한, 늦은 출발일망정 창의성이 두드러진 글을 빚는 데 정열을 쏟을 겁니다. 문예의 길을 사랑하여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두고자 애쓸 뿐입니다.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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