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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陽川) 허씨 집안의 다섯 천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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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호 칼럼

(문협회원, <계간수필>동인)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중종12~1580 선조13)은 강릉 출신으로 서경덕의 문인이다. 문과급제 후에 이조정랑, 동부승지, 공조참판,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부제학. 경주부윤을 지냈고,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가던 중 죽었다. 그는 동서 분당 시절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였으며, 30여 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생활이 검소하여 청백리에 오른 인물이다.

아들 성(筬), 봉, 균(筠) 또한 문과 급제자로서, 학문과 글씨가 빼어났다. 딸 초희(楚姬)도 비상한 글재주가 드러나 균과 함께 서얼 시인 이달(李達)에 수업을 받게 했다. 그들의 시문은 중국, 일본에서도 출판되어 ‘허 씨 5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명나라에 다녀온 후 향약의 시행을 극력 주청했지만, 이이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향약이란 “예속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바로잡아주며,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라는 향촌 자치규약이다. “이이가 ‘해주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다”라고 향약 시행의 공을 오로지 이이에게만 돌린 <선조수정실록>은 허엽의 주장이 옳았음을 이이의 문인들이 간접적으로 인정한 꼴이다. 허엽도 이이도 떠난 후일의 일이었지만, 일의 앞부분을 자르고 자기 스승만 돋보이게 하려는 사관의 얌체 짓이 왕조실록의 권위를 손상했다.

허엽의 사상적 기저는 성리학적 이념에만 고착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열린 세계관을 지녔기에, 딸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한문 교육도 했다. 초희의 오라비들도 누이의 교육에 협조적이었다 하니, 당시로선 보기 드문 가풍이었다.

조선의 여류시인은 풍습의 규제에서 자유스러운 기녀들이 대부분이다. 난설헌은 양반가의 여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자기 이름을 지녔고, 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조선의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허엽을 두고 이황은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이이는 “그의 이론은 모순된 점이 많고 글의 뜻에 통달 되지 못했다.”라고 폄훼했다.

퇴계나 율곡은 성리학을 궁구하여 나름의 일가를 이룬 학자였지만, 허엽은 현실 정치를 통해 만민이 공정한 처우를 받는 평등한 사회를 꿈꾼 것이다. 그는 간쟁(諫爭)에 앞장서서 조광조 윤근수 허자의 신원(伸寃)을 주청하였고, 윤원형. 이기 등의 처벌과 시무책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러다가 왕의 눈 밖에 나는 등 여러 차례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한 투사형 정치가였다.

장남 성(1548 명종3~1612 광해4)은 1583년 문과급제했다. 1590년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팀의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황윤길(서인)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고, 김성일(동인)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주장하자, 허성은 동인임에도 황윤길과 같은 의견으로 직간했다.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로 인한 폐해는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도 그에 합당한 벌이 없었음은 잘못이다. 그가 퇴계의 문하로서 당시 조정의 실권 파의 지지를 업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대비책이 없었던 조선이 7년여의 왜란으로 쑥대밭이 된 원인을 곱씹지 않을 수 없다.

허성은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예조, 병조, 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는 임란 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신 칭호도 받지 못하다가, 죽은 뒤에야 대접을 받았다.

차남 봉(1551 명종6~1588 선조21)은 1572년 문과급제 후 이조좌랑, 교리를 거쳐 창원 부사를 지냈다. 그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에 대립하였다. 1584년 병조판서 이이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하다가 종성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실의에 빠져 방랑하던 1588년 38세로 금강산에서 객사했다.

그는 특히 “양명학으로 무장된 중국학자들과의 담론에서도 주체적 인식으로 그들의 논리를 배척하였다.”라고 전하며, “깨끗하고 정숙하며 아름다운 시를 지은 시인”이라는 평을 듣는다.

삼남 균(1569~1618)은 1594년(26세)에 문과급제하고, 3년 뒤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했다 “그는 문재가 극히 높아 붓만 들면 수천 마디를 써냈다.” (광해군일기 6년)라고 전한다. 형조정랑, 수안 군수, 삼척 부사, 공주 목사, 예조참의,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지냈고, 두 번의 사행(使行)으로 명의 학자들과도 교유했다.

예교(禮敎)에 얽매인 선비들의 눈에 허균은 이단아라 할 만큼 타 문화에 이해가 깊고 넓었으며,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적 주장을 피력한 선각자였다.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은 성리학의 좁은 틀에만 안주할 수 없었다. 균이 도교, 불교에 천착하고, 천주교에도 지적 호기심을 뻗친 것은 고루한 성리학자들의 질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터이니, 그들이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

친한 서얼들이 반역에 연루되자 위협을 느낀 균은, 권신 이이첨의 밑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했지만, 이이첨은 그를 활용한 다음 토사구팽했다. 그는 균을 반역죄로 몰면서 단 한 번의 진술이나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균의 주변인들이 모두 불리한 진술을 하게 하는 등 무리하게 반역죄를 씌우고, 서둘러 처형했다.

균의 아들들도 참형을 받고, 허엽의 묘까지 파헤쳐졌다. 균은 조선조의 마지막 날까지 신원 되지 못했기에, 영원한 역적으로 남게 된다. 적서차별의 철폐, 남존여비의 철폐, 과부의 개가 허용 등 균이 주장한 이상(理想)은, 3백 년 뒤 갑오경장(1894년) 때에야 조선에 시행된 개혁 사상이었다.

균의 <遺才論(유재론)>은, “하늘은 재주를 고르게 주는데 이것을 문벌과 과거로 제한하니 인재가 늘 모자라서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진 이를 버리고, 개가했다고 해서 그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만이 천한 어미를 가진 자손이나 두 번 시집간 자의 자손을 벼슬길에 끼지 못하게 한다.…”라는 철학을 담았다.  

<유재론> <豪民論(호민론)> <홍길동전>은 균의 사상과 글재주를 알게 하지만, 선비 사회가 그의 열린 사고방식을 이해하기보다는 성리학적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그를 타도할 구실로 삼으니, 그런 게 바로 조선조의 불행이요 병폐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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