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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삼열 특별기고- 어머니 앞에서 삶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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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삼열
(전 토론토대학교 석좌교수)

 

어머니 앞에서 삶을 살핀다

 

 조선을 침탈한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근거도 의미도 없는 욕망에 빠져있을 때, 한반도 전역으로 번진 만세의 함성이 무참한 폭력 앞에서 흩어진 다음 해, 조선인으로 태어난 그 자체로 그녀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인 목사의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에게는 이미 평탄할 수 없는 일생이 약속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가난한 목사 외할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도 교육에 대한 관심은 상당했다. 어머니 역시 당시 지방의 평민들에게는 흔하지 않았던 고등교육(당시 여중)을 마쳤다. 타고난 탁월한 글솜씨와 손재주로 인해 어머니의 서예작품은 교장실과 교무실을 치장하는 예술품으로 쓰이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또한 타고난 성악가였는데, 이것이 장녀에게 전수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음치에 가깝다.

 

 신의주공립상업학교를 마친 후, 안동(단동)소재 흥업은행에 취업한 아버지와 결혼하고, 해방 후 남편의 고향인 신의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첫 아들을 얻었다. 간절한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사무엘(삼열)이라고 이름했다. 이듬해 월남하여 서울에서 한국전 도발 직전에 장녀을 출산했다. 이남에서 얻은 첫 은혜라 생각하여 혜일이라고 작명했다.

 

 딸의 출산 3개월 후 한국전이 터지고, 피난 중 남편과 친정 아버지를 동시에 잃는 끔찍한 불운을 겪으면서, 졸지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직 어린 5동생과 두 자녀를 둔 대가족의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전북 황등에서 면사무소 서기로 취업하여 생계를 이어가면서, 거제도에 있던 미 장로교 선교부를 찾아가 온 가족의 거처를 마련했다. 부산 서대신동의 한 모자원에 모친과 동생들 거처를 마련하고, 우리 3 식구는 새로 설립된 다비다 모자원에 입주하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제한적이었고, 교통수단도 부족했던 전쟁 중 24세의 과부로서는 놀라운 행보였다.

 

 부산 피난시절 시동생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국의 초기 양재학원에서 디자인과 재단을 수료하고 재능을 인정받아 수료하는 동시에 학원 강사로 근무했다. 4.19 학생봉기가 있었던 1960년 서울로 이주하여 발로 작동하던 수동식 재봉틀 2대로 아동복 제품 자영업을 시작했다.

 

 물건이 인기를 얻으면서 제품에 레벨을 붙여야 한다고 하여 장녀의 이름으로 하자는 나의 의견을 따라 ‘혜일사’ 아동복 제조사가 탄생했다. 이후 1960년 후반부터 동생들이 모두 캐나다로 이주하고, 아들 역시 아내와 함께 토론토로 떠났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딸 부부와 함께 토론토로 이주하셨다.

 

 어머니는 평생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면서 한을 가슴에 묻고 사셨다. 스물 다섯이 채 되기 전에 마치 유복자와 같았던 3개월짜리 딸과 5살 된 아들을 뒤로 하고 떠난 남편을 보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친정아버지를 함께 잃었다. 고집스런 목사와 신학생 이었던 사위를 함께 체포한 북한군들은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기독교인들을 살려 보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 분들의 사망을 모른 채 10년간 매일밤 꿈에서 아버지의 방문을 맞아드렸다. 종종 아침 가정예배 전에 “어제 밤에는 너의 아버지가 위 아래 흰 옷을 입고 오셨다. 매일 그렇듯이 새벽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서둘러 떠나셨어. 아마 곧 오실거야”라고 하셨다. 그런 날 아침에는 다다미 3쪽의 집을 훤히 밝히던 어머니의 미소를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캐나다에 오신 후 나의 최종 학위수여의 기쁨이 식기 전에 어머니는 할머니의 임종을 맞으셨고, 그 후 가장 가까이 지나오던 남동생이 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이런 이별의 비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로 어머니는 다시 한 번 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는 장녀의 사망이었다.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보내는 것과는 또 다른, 자신의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주던 외동딸을 앞세우는 어머니의 쓰라림은 아들인 나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버지를 가장 비극적으로 보낸 어머니는 한반도 근대사의 잔혹함을 맨몸으로 견디어 온 대표적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민자들에게는 또 다른 고독과 절망을 감당해야 하는 실존적 도전을 안고 살아야 한다. 어머니 역시 실향민으로서 두 차례 고향을 등져야 했고 역사의 갈퀴로 인해 험난한 고비를 겪었다.

 

 외세의 점령은 나라를 잃는 비통함을 배우게 했고, 전쟁의 횡포는 잔혹함에 있었고, 이민의 냉혹함은 어머니를 고독 속으로 내쳤다. 이렇듯 끊이지 않는 삶의 냉혹함에 대하여 어머니는 모태신앙을 지키셨고, 이를 자녀들에게 전수하면서, 모든 순간 삶에 극히 충실했고, 결코 어려운 현실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기에 고난 속에서도 많은 희락과 감격을 지어낼 수 있었다. 후원하던 동생들이 성장하면서 독립된 성인으로 살림 날 때 상당한 보람을 경험했고, 동생들의 가족들이 어려울 때는 또 다시 보금자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감사했었다.

 

 딸의 공연 중에는 기쁨으로 눈을 적셨고, 아들의 설교와 강연을 들으면서 찬양으로 답했다. 때로는 남에게 교만하게 보일 정도로 벅찬 가슴을 드러내기도 한 결코 외롭고 고통스럽기만 한 삶은 아니었다. 그 시대에 태어나 국민적 차별과 잔혹한 전쟁의 회오리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수 많은 조선의 여인들이 걸었던 그 여정을 당당하게 찬송하며 걸어온, 고난을 이긴 성공적 삶의 모델이었다.

 

 이제 그녀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서 그리던 가족들과 함께 계신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녀의 후손들은 코리언 캐네디언으로 가정과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를 사모하는 책임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20. 5. 4)

(* 글은 3 전에 작고하신 필자의 모친에 대해 것입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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