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kyjeong
웰빙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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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속세를 떠나서(2)
frankyjeong

 

(지난 호에 이어)

간혹 필자에게 종교가 있는지를 묻는 독자들이 있다. “물론이죠.”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 바로 돌아오는 말은 “그런데 왜 그렇게 종교에 부정적으로 칼럼을 쓰세요?”라는 물음이다. 순간 필자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과연 어떻게 설명을 해드려야, 필자가 원하는 의미를 짧고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필자는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 드려지고 습관처럼 필자의 의식과 생활 속에 젖어 들어 아무런 의구심 없이 믿고 따르는 생활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초등학교를 거치면서 물상이라는 과목과 중학교에 이르러서는 물리와 화학 같은 과학과목을 접하면서 성서와 미사 또는 예배라는 말씀과 의식 그리고 전도를 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무엇인가 서로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혼자서 고민도 하고, 신부님, 수녀님께 물어보기도 하고 교회 전도사인 사촌 형들이나 지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예전에도 칼럼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만, 이전에는 주일날 늦거나 빠지게 되면 하느님(하나님)께 벌받는다는 무서운 세뇌의 공포 속에서 그 한 주 동안 벌어지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이 나의 죄로 벌을 받아서 벌어지는 일로 착각하고 지내던 기억들이 아마도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하나님)은 벌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닌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신부님의 답변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의 소소한 잘못으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안도감과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인간들이 잘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결과를 만드시기 위해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사랑으로써 세상을 돌보신다고 믿고 있었고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생활을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어린 필자에게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사회에 나오면서 더 많은 과학적인 사실과 문명의 이기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우매한 인간들에게 성서의 말씀이 진실로 전달되기란 참으로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모호한 표현들이 많아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또 다른 번뇌와 고민이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제나 목회자들도 성경 한 줄이 내포하고 있는 진실이 무엇이라고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면서 각기 다른 해석과 주장을 할 수 있음이 어찌 보면 오묘한 진리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성경 속의 어떠한 문장과 배치되는 다른 한 문장이 또 다른 언어의 유희라고 느껴져 과연 성경이 과거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들 사이의 시공간적인 괴리를 메워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겼다고 하는 성경을 대하면서 일생을 다 바치는 사제와 목회자들은 과연 생의 마지막 순간 어떠한 진실을 알고 그 인생을 마감하는지도 궁금하다.

사제들은 속세에 살면서 속세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에 산다. 사제의 맹세로서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자녀를 갖지 않기에 이렇게 분리되었지만 중세시대 권력과 부정부패에 빠졌던 가톨릭에서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신교가 나타나면서 목회자들도 일반인들과 같은 속세의 삶을 살다 보니 일반인들의 고충을 공감하고 같은 입장에서의 토로할 수 있는 장점도 갖게 되었으나 반면에 속세의 삶에 빠져있다 보니 성직자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함에 방해를 받는 단점도 생기게 된 것이다.

성직자가 보통 인간들과 다른 점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하지 않고 수도나 수행으로 극기 함을 통하여 성스러운 마음으로 주님의 길로 양떼들을 무사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보통인간들과 같은 인간의 허울을 쓰고 본인들의 잘못됨에는 지극히 자비로우며 마치 착한 목자인양 행동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아닐까? 물론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이 있지만 그만큼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내세의 삶을 믿는다고는 하나 어떻게 될지는 알 길이 없다. 엄마 뱃속의 삶에서 뱃속 밖의 삶을 아는 아이가 과연 있었을까?

태어나면서 처음 폐로 숨쉬는 고통을 느끼며 울면서 태어난 아이가 속세의 삶을 살아가면서 속세를 떠나기 전 내세의 삶을 과연 알 수 있을까? 단지 믿음뿐인데,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는 속세에서 살아온 방식과 종교에 영향을 받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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