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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조국과 태극기-지렁이잡이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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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박순애(토론토)

 

오늘은 추석날이다. 세월과 같이 가는 것인지, 세월을 뒤따라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열심히 살아간다는 구실로 곁눈질 해볼 새도 없이 살아왔다. 고향에서는 모든 형제, 친척들이 모여 집집마다 북적대며 소중한 시간을 보낼 때다. 그러나 나는 지금 캐나다에 와있다.

 

 나는  대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이렇게 세 아이를 둔 엄마이자 열심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훌륭한 남편의 아내이다. 말도 문화도 다른 타국생활은 맞벌이라는 노력에도 녹록한 생활을 선사하지 않는다.

 

나의 직업은 지렁이잡이꾼이다. 나서 자란 어릴적 풍속도 무시한 채 허우적거리며 삶이라는 길 한복판을 걷고 있다.

 

 지금 시간 저녁 7시7분, 해가 채 지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려 일하러 가는 중. 지렁이잡이 올해 3년 차가 된다. 토론토 시내 여기저기를 거쳐 사람들을 태우고 주유소에 들러 트럭에 기름도 두둑하니 채웠다. 매일 그러하듯이 기사가 사준 뜨거운 커피도 하나씩 손에 들고 마시며, 7명이 각자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칸칸이 달린 창문 밖을 내다보며 오늘도 지렁이 잡으러 가고 있다.
 

                                                                       ▲지렁이잡이 현장


 한참을 달려 북적거리는 고속도로 옆 멀지 않은 거리 주변에는 자그마한 도시들이 늘어서 있다. Hey’s 라고 쓴 간판도 보이고, Top이라고 적힌 간판도 보이는데, 저 멀리서부터 가슴 뭉클해지는 이 기분, 아…태극기다! 맞다. 나한테도 조국이 있잖아. 당당한 내 조국, 대한민국.

 

 늘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릿해오는 나의 친정집. 열심히 산다는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눈물 콧물 남몰래 흘려가면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 타국에서 내 잠시 동안 엄마 잃은 고아가 되어 서럽게 살기도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당당하게 캐나다 국기와 함께 어깨를 겨누며 펄럭이는 내 민족의 혼을 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간판이 SAMSUNG 이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쭈~욱 펴진다. 근데, 왜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지 모르겠다. 친정아버지 얼굴을 본 듯이 너무 감격스럽다.

 

 아, 꿈에라도 가고 싶은 나의 친정. 이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나는 왜 이제서야 봤지? 이 길을 3년이나 지나쳤는데. 달리는 차 안에서 지그시 눈을 감으며 꽃피는 들판과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어우러진 내 조국에 가있는 환상을 한다.

 

너무도 아름답고 화창한 들판. 봄이면 제비가 처마 밑에 둥지를 틀어 새끼를 낳고, 그 밑 마루에 수북이 떨어져 쌓인 배설물들을 호미로 긁어 삽에 담아 치우시던 친정아버지 모습도 생생히 보인다.

 

 뒷산 앞산 연분홍 진달래. 이 산 저 산 비둘기 구기구기. 뻐꾸기 뻐 뻑꾹, 빨간 모자 쓴 딱따구리 부부는 집앞 늙은 황철나무에 왕진을 와서 따따라락 두드리는 소리 요란한데.

 

 마을을 감돌며 흐르는 작은 냇가에 동네 꼬맹이들이 미꾸라지잡이 하느라 삼태기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린다. 집집마다 언니들은 농장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감자를 한 바구니씩 들고 나와 냇가에서 껍질을 깎는다. 식구들의 저녁밥과 다음날 아침밥을 지을 준비를 위해서다.

 

 텃밭에서 강냉이 이삭도 따서 오사리를 벗겨 쇠가마솥에 넣는다. 강냉이 대공도 아래위를 잡고 뚝 꺾어 단물을 씹어 빨아먹고 퉤, 퉤, 찌꺼기를 뱉어낸다. 그렇게 지어진 저녁은 어둑해서야 일터에서 돌아오시는 아빠 엄마와 함께 오이랑 풋고추에 토장을 폭폭 찍어 맛나게 먹고, 엄마 팔을 베고 옛말도 듣고. 노래도 부르다가 꿈나라로 간다.

 

 나는 일찍 5살에 친엄마를 병으로 잃고 8살에 맞은 새엄마를 참 좋아했다. 도란도란 엄마 아빠, 아침밥 지으시며 나누시는 얘기 소리에 눈 비비며 깨어서는 제일 먼저 하는 일. 마당에 자리잡은 개 집에서 갓 낳은 새끼 강아지들 꺼내놓고 잘 잤어? 말 거는 것.

 

 딸그락 밥그릇 숟가락 소리와 함께 엄마의 재촉하는 아침소리 들으며 학교에 가고, 아무튼 마냥 즐겁기만 하다. 등에 맨 책가방 속 교과서들과 필통 안에 연필들 달랑대는 소리도 무시하고 숨이 목까지 차도록 뛰어도 힘들지가 않다.

 

 마을 오빠들의 공 차는 소리도 들려오고, 빈 새둥지 털려고 높다란 나무에 교복치마 입은 채로 오르다 또래들의 까르륵 놀려대며 웃는 소리에 다시 내려오는 동갑생도 보인다.

 

꽃들도, 새들도, 벌도, 나비도, 그리고… 바람도, 나무도 우리말을 한다. 먼지가 풀썩이는 길가에 무심한 발길에 채이는 조각돌들도 “에그머니나…떽 떼그르르~”  굴러가며 고향 사투리를 내어 뱉는다.

 

 벌레들도…지렁이들도…천지의 모두가 코리언이다. 파아란 하늘 위로 둥둥 떠가는 구름도 되어 보고, 짧은 날갯짓을 퍼덕이며 “껑 꺼거겅~” 외쳐대는 뒷산의 까투리도 되어 본다.

 

 덜커덕 거리는 트럭에 몸을 맡긴 채 앞으로 언제 어느 때에 다시 찾아갈지도 모르는 어릴 적 그 땅으로 미련을 그리며…부족한 잠에 휩쓸리면서도 이악하게 버텨가는 올해의 지렁이잡이에 아낌없이 깡그리 에너지를 소모해가며 나의 육체는 햇볕 아래 놓인 눈사람마냥 지금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

 

 가고 싶은 꿈속의 그곳으로. 잠이 들다. (2018년 9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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