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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종시계 (에세이21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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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미시사가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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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내가 태어난 시골집 대청마루에 커다란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이 삼 일에 한 번씩 문을 열고 밥을 주셨다. 시계 판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리면 '뚜르 -룩, 뚜룩'하는  소리가 났다.

 

 시계에 밥 주는 일은 아버지가 하시는 유일한 집안일이었다. 늘 옥색 두루마기를 바람에 날리며 시내(市內) 출입을 자주 하셨다. 오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시내로 살림을 나가게 되었다. 오빠를 좋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한 준비가 겉으로 드러난 이유였다. 이사 준비로 부산한 엄마와 달리, 시골집에 혼자 남은 할머니가 외롭다며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를 잡으셨다.

 

 시골, 그 너른 집에 할머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한낮의 햇살이 지루할 때면 마루에 누워 시계추 소리를 세고 있다가 잠이 들기도 하였다. 천천히 가는 시계를 보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마다 동구 밖 언덕에는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훤칠한 키의 아버지가 걸어오고 계셨다. 옷도 벗지 않고 마루로 성큼 올라서서 시계에 밥을 주고는 하룻밤도 채 주무시지 않고 시내로 나가셨다. 눈물을 짜는 내게 할머니는 '초등학교 들어가면 데려갈 거다' 하고 달래셨다. 다시 시계가 느려지면 내 어린 시간도 기다림으로 멈춰지고는 하였다.

 

 오빠가 서울의 명문 중학교에 합격이 되었다며 시내에 살던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했다. 엄마의 상기된 표정과 달리 할머니는 긴 담뱃대만 물고 계셨다. 서울은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두려움의 도시였다. 6.25 때 할아버지를 잃고 홀로 사신 할머니에게는 장손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간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섭섭함을 담배 재를 놋 재떨이에 터시는 것으로 대신하셨다.

 

 다시 시계가 멈추었다. 할머니는 재봉틀 의자를 시계 밑으로 옮기고 나에게 단단히 잡으라 하셨다. 시계 문을 열고 태엽을 감으셨다. 아버지처럼 빠르고 힘차진 않아도 천천히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의자에서 내려올 때마다 알지 못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마루에 앉아 담배 대를 잡으셨다.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아들 하나에 내리 딸 다섯을 둔 할머니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셨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차를 탔다. 서울은 할머니의 말대로 두려움의 도시였다. 진한 시골 사투리의 내 말투는 늘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이름만 겨우 배우고 들어간 초등학교 수업은 나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가나다라'를 배우기보다 급한 것은 서울말을 쓰는 것이었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감수해야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돌잡이 여동생을 업어주는 일도 빠질 수 없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또래들이 하는 고무줄놀이에 끼고 싶어 등에 있는 동생을 시멘트 쓰레기통 위에 올려놓았다가 떨어트린 일도 있었다. 자지러지게 우는 동생의 콧잔등에 옅은 선혈이 보였다. 그런 날은 종일토록 보채는 동생을 업고 다친 변명거리를 만들며 장에 간 엄마를 기다렸다.

 

 늦여름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뜨개질하던 엄마가 동생에게 아버지가 어디쯤 오는지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셨다. 오빠에게 아버지 마중을 나가라고 했다. 통금 사이렌이 불자, 오빠 혼자 돌아왔다. 엄마는 밤을 꼬박 새워 뜨개질을 하셨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분위기에서 도망치듯 학교에 갔다. 장마가 시작되는지 밤마다 비가 내렸다. 오빠는 며칠째 우산을 들고 나가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늘 혼자 돌아왔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로 터전을 잃은 남은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오빠는 입주 가정교사로, 나는 청주에 있는 고모네 집에, 어린 동생은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사촌 언니 집에서 장사를 배운 엄마가 북선동 산꼭대기에 방 한칸을 장만했다. 꼭 일년 만에 가족이 다시 모였다. 동생이 문제였다. 너무 어려 엄마가 장사를 나가면 돌볼 수가 없기에, 당분간 시골 할머니 댁에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반 무렵, 엄마가 시골집에 가서 동생을 데리고 오라 하셨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가 계실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차를 탔다. 마당에 들어서니, 과자 그릇을 든 동생이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날만큼 반가운 나와 달리 말갛게 쳐다보다가, 서울에서 온 언니라는 말에 그제야 다가왔다.

 

 괘종시계는 긴 추를 늘어뜨리고 누런 파리똥이 달라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시계 밥 주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한동안은 위험을 무릅쓰고 의자에 올라가 태엽을 감으면서, 아들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이제 그도 지치고 부질없다고 생각하셨을까? 고물 장수가 온다고 했다.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신다고, 그 괘종시계도 주신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쓰러져가는 시골집을 허물고 현대식으로 다시 지었다. 대청마루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크지 않은 거실이 만들어졌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엄마는 괘종시계가 걸렸던 곳에 예전 것과 모양이 비슷한 시계를 걸어 놓으셨다. 밥을 주지 않아도 되는 전자시계다.

 지금도 고향 집에 가면, 구십이 넘은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이 보일 것 같다.

 

<당선 소감>

 덜 가지신 분 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잠시 머물다 돌아간다고 짐을 싼 것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민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일을 하다가 가끔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글을 써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바이러스로 병원, 은행, 백화점 그리고 교회까지 문을 닫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문을 닫고 있을 때 완료추천의 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렵고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굵고 환한 빛 기둥이 가슴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혼자만의 기쁨에 젖어 있어 많이 미안했습니다. 덜 가지신 분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미흡한 글 밀어주신 <에세이21>의 예당 선생님과 모든 선생님들께 정중하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한 발자국 멀리서 지켜보고 격려해 주신 선배님,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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