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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공동체 기획시리즈 - 가족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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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선(사무장/회원)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편안함, 따뜻함, 그리움, 고마움, 미안함의 온갖 감정들이 마음속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캐고 또 캐도 고갈되지 않을 많은 이야기. 가족 속에 내 존재 자체가 있다.

 

 나에게, 가족은 등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첫 기억. 어머니의 등이었다. 어두운 겨울 밤길, 바닥에 넘어진 어머니는 아픔 때문이었는지, 어떤 서러움이 통증을 핑계 삼아 터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꺼이꺼이 울었다. 업힌 채 어머니의 그 울음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그 춥던 날이 가장 먼 기억이다.

 

 1살이 채 안 되어 소아마비로 하반신 마비가 된 이후 시골에 살며 휠체어도 없던 내게 이동 수단은 대부분이 가족의 등이었다. 학교 들어가기 직전,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아버려 거부하기 전까지 아기 포대기는 내 피부와 같았다. 먼 거리 통학을 위해 배운 어머니의 자전거가 추가되었고, 내 덩치가 커짐에 따라 등을 내어주는 사람은 아버지로, 큰형으로, 작은형으로 역할을 나누고 옮겨 갔을 뿐 긴 시간 동안 나는 가족의 등에 의존해 살아왔다.

 

 밤샘 아르바이트를 몇 달 동안 하던 작은형은 어느 날 프라이드 베타 차 키를 내 앞에 내밀었다. 큰형은 386 컴퓨터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향했다. 막내아들이 자가용 차에 휠체어와 컴퓨터를 싣고 떠날 때 어머니는 또 울었다. 그렇게 가족의 등에서 조금씩 내려왔다.

 

 2005년 개인사업과 사회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토론토에 사는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놀러 오라’는 그 한마디에 항공 티켓을 끊었다. 이제 겨우 토론토에 정착한 친구는 차도 없고, 운전도 못하는 처지였으나 나이아가라 폭포는 보여주고 싶어 해서 카지노 행 버스를 탔다. 문제는 버스에 오르는 일. 162cm의 가냘픈 이 여인은 동갑내기인 나를 자기 등에 업어 버스에 태웠다.

 

 다음 해인 2006년 2월 우리는 토론토에서 결혼했다. 이렇게 두번째 가족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우리 막내 장가만 가면 내가 덩실덩실 춤을 추겠다”는 말을 은연중 하시곤 했다. 하지만 외로워 죽을 것 같던 사춘기와 상처받기 두려워 철벽을 둘렀던 청년기를 지난 나는 결혼은 내 인생 계획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 휘어지고 뒤틀린 몸을 보여줄 수 없고 받아줄 사람도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이라는 치기어린 확신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내 모자람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열어준 아내와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역시 계획에 없었지만 하늘이 허락하여 준 딸 아이까지, 결국 작은 가족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전적으로 삶의 이유가 되는.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 2013년에 본격적으로 만난 성인장애인공동체. 머리로 시작하여 가슴으로 가족이 되었다. 한인사회에 장애인을 위한 단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처음 존재를 알았을 때 다행이다 싶었다. 기회가 된다면 도와주고도 싶었다. 그렇다고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내 처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마주한다는 것이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16주년 행사에서 한 순서를 맡아 노래해 달라고 요청왔을 때 나름 적당한 거리에서의 도움이 될 듯하여 수락했다.

 

 그렇게 준비하던 어느 날 공동체의 위기 운운하며 한인 언론에 크게 보도되더니 창립 주년 행사가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폐를 놓고 고민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무슨 호기였을까? 엉겁결에 참석한 비상대책 비슷한 회의에서 창립 초기의 마음으로 다시 해보자는 의견을 냈고 그 말에 대한 책임으로 이듬해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고 이후 4년간 회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만 해도 단체의 필요성과 역할 등 기능적 관점으로 접근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회원들의 아픔과 기쁨, 눈물과 환희, 절망과 재활의 희망 등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고 나누는 사이 이들과 점점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갔다. 왜 아니겠는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좋은 계절엔 두세 번도 본다. 굳이 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같은 아픔을 겪은 사이다. 잘난 척할 것도 숨길 것도 굳이 없다. 비록 피와 호르몬은 섞여 있지 않아도 우정과 사랑과 위로와 연민이 씨줄 날줄이 되어 엮인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 책임을 맡고 공동체 일원이 되었을 때 다짐한 것이 있다. ‘길지 않은 인생,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유의미한 말과 미소와 행동으로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하자. 내 등을 조금 내주자.’였다. 그렇게 시작했던 공동체와의 만남. 이제는 안다. 하나의 가족이 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Hollies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의 노랫말이 좋아 자주 듣는다. “But I’m strong, strong enough to carry him, he ain’t heavy – he’s my brother” 그 사람을 업고 있어도 무겁지 않은 것은 그가 나의 형제이고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의 일원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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