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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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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7)-잔 타일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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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다복(1815-1860)

 

레티셔 크리스천 타일러(1790-1842)


레티셔는 1790년 버지니아주 뉴 켄트 카운티에서 잔과 동갑내기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라버트 크리스천 대령은 흑인 노예를 거느리는 농장을 경영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항상 수줍어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레티셔는 법대에서 잔을 만나 5년간 열애를 하며 죽으나 사나 레티셔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잔과 1823년 23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레티셔는 결혼 수개월 전에야 잔에게 첫 키스를 허용했다.
결혼생활 29년간 8명의 자녀를 낳고 양육하며 정치생활에 몰두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행복한 가정을 유지했다. 백악관에 입성하기 2년 전에 다산으로 몸이 쇠약해진 레티셔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입성 후 1년이 지난 1842년 10월 10일 51세의 레티셔는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 백악관에서 사망한 첫 번째 국모가 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태어난 농장에 안치되었다. 백악관 귀빈 영접은 둘째 딸 레티셔가 맡았다.

 

줄리아 가디너 타일러(1820-1889)


줄리아는 1820년 5월 4일 뉴욕주 가디너 개인소유 섬에서 태어났다. 부친 데이빗 가디너 뉴욕 상원의원은 흑인노예를 부리는 농장부호로 알려졌다. 줄리아는 이스트 햄프턴에서 성장하며 뉴욕의 취가로 상류사회여성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42년 1월 20일 21세의 줄리아는 백악관에서 타일러를 소개받았다. 9월10일 타일러는 부인 레티셔 사망 한달 전 30세 연하의 줄리아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줄리아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변심을 일삼는 그는 병석에 누워있는 전 부인과의 결혼 전 약속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헌신처럼 저버렸다. 


1843년 2월 22일 백악관 무도회에 초청받은 줄리아는 청혼을 하는 타일러를 단호히 거절했다. 9월 3일 집념이 강한 타일러는 줄리아 부친 가디너와 줄리아를 프린스턴 증기군함 포토맥강 유람 항해에 초청했다. 


축포를 올리고 향연을 즐기다 축포를 한번 더 올리자고 하여 귀빈들이 갑판으로 모이는 중 축포가 폭발하여 엄셔 국무장관, 길머 해군장관과 가디너를 포함한 많은 귀빈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부친을 잃어 비통에 빠진 줄리아는 타일러의 끈질긴 감언이설과 유혹에 홀연히 1844년 6월 26일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1860년까지 14년간 7명의 자녀를 낳았다.


타일러는 백악관에서 재혼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15명의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미 대통령의 다산 다복 기록을 갖게 되었다.


전 처의 큰딸보다 5살이나 어린 줄리아는 새어머니 대접을 못 받았지만 1845년 3월 4일까지 9개월간 백악관에서 초호화판 사교생활을 영위했고 흑인 노예제도 정책보존에도 영향을 과시했다.


1862년 남편 사망 후 북군에게 60명의 노예와 1600 에이커의 농장을 뺏기고 1881년부터 연간 5000 달러의 대통령 미망인 연금으로 여생을 조촐하게 살다가 1889년 7월 10일 리치먼드에 자리잡은 엑스체인지호텔에서 69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할리우드 장지에 안장된 타일러의 옆에 자리잡았다. 


 
대통령 퇴임 및 반역(1845-1861)


1845년 3월 4일 대통령직을 퇴임한 타일러는 버지니아주 찰스 카운티에 위치한 3000 에이커의 그로우브 농장을 구입했다. 이 농장은 해리슨 전 대통령이 건축한 90 미터의 긴 주택을 가진 농장으로, 사용하지 않고 비어 있었다. 타일러는 농장이름을 셔우드 포레스트로 바꾸고 면적을 1600 에이커로 축소시켰다. 그는 60여명의 흑인노예를 거느리며 고수익을 내는 농장을 경영하며 틈틈이 흑인노예해방운동을 반대했다.


여기에서 태어난 막내딸 펄은 1947년까지 생존했고 현재 이 농장은 손자 해리슨 타일러가 소유하여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미국 전역의 노예해방운동을 선언하여 미 남서부는 주 의용군을 소집하며 연방탈퇴 운동을 도모하게 되었다. 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타일러는 피스 컨퍼런스를 열고 링컨에게 노예주와 노예해방주를 대표하는 2원제의 상원으로 나누자고 했으나 링컨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4월 17일 분쟁지역에 미 연방군을 동원하여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실망한 타일러는 6월 버지니아주를 남부연합(The Confederate)에 가입시키고 링컨의 노예해방운동에 반대했다. 8월에 남부연합 상원의원이 되어 활동하고 11월에 남부연합 하원직을 맡아 1862년 2월 미 남부연합하원 개원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타일러는 전직 대통령으로 미 역사상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반역의 우를 저질렀다.

 

사망(1862)


타일러는 나이가 들면서 골골하며 감기에 자주 걸렸다. 어지러운 병증세가 심하여 버지니아 농장에 돌아온 타일러는 1862년 1월 18일 숨을 쉬지 못하며 27년 후 줄리아를 곁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링컨은 타일러의 미 연방국장을 부결했고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대통령은 남부연합기를 타일러의 관에 덮고 남부연합국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의 시신은 리치먼드 헐리우드장지에 안장되었다.


타일러는 미 대통령 중 사망 후 관위에 성조기를 두르지 못한 유일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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