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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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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3)-윌리엄 헨리 해리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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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컴서의 장렬한 최후

 

멕스 요새 포위작전(1813년 4월28일-5월 9일)

1812년 9월 1일 미 북서부 총사령관에 임명된 해리슨 준장은 디트로이트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미군을 이끌고 인디애나를 떠나 디트로이트를 향해 진군했다.

 

 윈체스터 준장이 이끄는 미군이 디트로이트 서남쪽으로 56KM 떨어진 프렌치타운 전투에서 영군과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학살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리슨은 1813년 2월 진군을 멈추고 민병 4,000여명을 동원하여 디트로이트 서남쪽으로 114KM 떨어진 오하이오주 멕스 요새(현 패리스버그)에 젖은 진흙으로 두껍게 쌓아 올린 호를 파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영군과 원주민 전사의 연합군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를 감지한 테컴서는 원주민 전사 1,200명과 프락터가 이끄는 1,000여명의 영군과 연합해 4월 28일 멕스 요새를 포위하였다. 프락터는 포문을 열고 수천 발의 포탄을 요새로 날렸지만, 포탄은 젖은 진흙으로 쌓아 올린 벽에 박혀 요새는 파괴되지 않았고 미군의 인명피해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원주민 전사들이 난공불락의 멕스 요새 공격을 포기하고 전장을 떠났다.

 

일부 미군은 영군의 포병부대를 습격하기 위해 요새를 빠져 나왔다가 테컴서의 유인으로 요새 밖 숲 속 깊이 들어가 잠복한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영군의 포로가 되기를 원했지만 프락터는 포로들이 원주민의 손도끼에 학살당하고 두피를 벗겨지는 것을 방관하였다. 테컴서는 원주민의 미군 학살을 중지시키고 프락터를 질책하였다. 둘은 전략적인 의견충돌이 잦아 사이가 벌어졌다.

 

해리슨을 돕기 위해 켄터키주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 미 의용군이 계속 증강하자 테컴서와 프락터는 5월 8일 멕스요새 공격을 포기하고 일단 퇴군했다가 7월 재공격을 시도했지만, 해리슨의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고 60명이 지키는 근처의 스티븐슨 미군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증강되는 미군의 반격을 받았다.

 

프락터는 테컴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군명령을 내리고 디트로이트를 통해 캐나다로 후퇴했다. 수비에 성공한 해리슨은 점점 불어나는 미 의용군을 지휘하여 총공격에 들어갔다.

 

테임스 전투(1813년 10월 5일)

이리 호수 해전 패배로 디트로이트를 장악했던 영군은 호수를 통한 보급이 차단되어 디트로이트를 버리고 캐나다로 후퇴했다. 9월 26일 디트로이트를 탈환한 해리슨은 후퇴하는 영군을 추격했다.

 

프락터는 영군 800명과 테컴서의 샤니족 전사 500명을 이끌고 벌링턴 고지로 후퇴하는 중 온타리오 런던 서남쪽으로 80KM 떨어진 챠탐 근처의 테임스강에서 해리슨이 이끄는 4,500명의 미 추적군대와 대적하게 되었다.

 

프락터 영군은 사기 저하로 오줌을 지리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원주민은 침묵과 사생결단으로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5일 새벽 프락터는 아침식사를 하는 영군을 5KM 후퇴시킨 후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이를 관찰한 해리슨은 제임스 잔슨이 이끄는 켄터키 기마병 1,000명을 돌진하게 하였다. 용감한 원주민 전사들의 총격으로 기마병 15명이 쓰러지고 전투가 치열해지자 프락터는 미군 250명과 함께 줄행랑을 치고 나머지는 총을 버리고 항복하였다. 이로 인해 무능한 프락터는 귀국 후 영국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영군의 도움 없이 원주민 전사의 9배 되는 미군과 대적해야 되는 테컴서와 원주민 전사들은 하늘에 비장한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애처롭게도 혜성처럼 날렵하게 미군 사이를 휩쓸던 테컴서가 숲에서 포위한 미군의 총격을 맞고 쓰러졌다.

 

테컴서의 나이 45세. 추장을 잃은 원주민 전사들은 비통에 빠져 전의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전투는 해리슨의 승리로 끝났다. 역사학자들은 테컴서의 시신 행방과 테컴서에게 총격을 가한 인물을 확인 못하고 있다.

 

이 전투로 영군 50명과 원주민 3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영군 6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테컴서의 맹렬한 전투로 미군은 약 37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악연의 끝맺음

해리슨과 테컴서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영토확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해리슨으로부터 조상이 내려준 땅과 풍습을 지키려는 테컴서의 꿈은 장렬한 전사로 끝나고 원주민들의 아녀자들은 약육강식에 희생되었다.

해리슨 작전에 의해 테임스 전투에 승리한 미국은 1812년 전쟁에서 반전하게 되어 1815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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