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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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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미 합중국 대통령(6)-앤드류 잭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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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길(Trail of Tears, 1830-1842))

총 길이: 약 8,120 KM

강제 추방된 원주민 수: 100,000명 추산

사망자 수: 15,000명 추산

 

플로리다 침공(1816년-1819년)

뉴오얼린스 전투 승리 후 잭슨은 허미티지 농장으로 돌아와 농장을 관리하며 미 남부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1816년 미국과 플로리다 국경의 세미놀 원주민 전사들은 미 정착민 농장에서 도주한 흑인 노예들과 함께 조오지아주 미 정착민들을 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잭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이끌고 세미놀 전사들을 일시에 격퇴시켰다.

 

1818년 스페인의 플로리다로 도피한 세미놀 전사들은 플로리다에서 자유가 보장된 흑인 노예들과 연합하여 계속 미 정착민들을 공격하여 먼로 대통령의 하명을 받은 잭슨은 플로리다 서쪽은 물론 플로리다까지 침공하여 세미놀 전사들을 궤멸시키고 원주민 소탕을 이유로 플로리다지역의 스페인 영토를 점령하여 먼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1819년 미 상원은 스페인과 전면 전쟁을 우려하여 잭슨의 플로리다 점령을 비난하였고 먼로는 잔 쿠인지 애덤스 국무장관의 외교능력을 이용하여 플로리다 서쪽과 플로리다를 스페인으부터 500만달러에 구입하였다.

 

1824년 대선 패배(1824년)

1822년 7월 22일 테너시주 지명으로 대선후보에 오른 잭슨은 중앙은행 폐지, 정부의 부정부패 척결, 수입 면세 감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백인의 선거권 부여 등의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전쟁영웅으로 특히 남서부에서 인기가 높았다.

 

1824년 12월 1일 선거 결과 41.4%의 지지율로 99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잭슨은 선거인단의 과반수인 131표를 얻지 못해 하원의 표결로 들어갔으나 30.9%의 지지율로 84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잔 쿠인지가 경쟁자 클레이의 표심을 얻어 잔 쿠인지에게 패배 당했다.

 

1828년 대선 압승(1828년)

1825년 대선 후보자로 지명을 받은 잭슨은 4년 전 선거공약 중 보통사람들의 민주화된 선거제도를 강력히 주장했다. 유세기간중 양 선거진영은 역사상 최악의 후보자 개인 인신공격으로 응수했다.

 

1828년 12월 2일 선거결과는 55.5%의 지지율로 178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잭슨이 44%의 지지율로 83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은 잔 쿠인지를 제치고 대선에 압승했다

 

12월 22일 대선 압승 후 대통령 취임식 10주 전 사랑하는 부인 레이철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원인은 잔 쿠인지 선거진영에서 레이철이 2중 결혼한 간통으로 인신공격을 당한 심리적 충격이었다.

 

12월 24일 레이철 시신을 허미티지 장지에 안장시켰고 잭슨은 다음과 같은 인용구를 남겼다

 

“만약 내가 천국에서 나의 부인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천국은 나의 천국이 아니다.”

 

 

대통령 재임(1829-1837년)

 

취임식 및 내각정책(1829)

1829년 2월 11일 부인 사망의 슬픔을 않고 워싱턴에 도착한 62세의 잭슨은 마튼 밴뷰렌 국무장관, 잔 이튼 국방장관, 새뮤엘 잉햄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을 편성하고 재임 중인 애덤스 대통령과 만남을 피했다.

 

3월 4일 취임식에는 애덤스가 불참했다. 잭슨은 일반인들을 백악관에 초청하여 혼란스러운 파티를 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잭슨은 내각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내각의 잦은 경질을 시도했지만 후에 효율성 저하로 포기했다. 지연관계로 인한 내각편성을 방지했고 전 정권 내각과 고위관리인들의 부정부패를 수사하고 관련된 각료들을 경질했다

 

원주민 제거 정책과 눈물의 길(1830년-1842)

17세기 초 북미에 도착한 백인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소생한 후 시간이 지나며 인구가 늘고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원주민들의 땅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원주민들의 땅을 매입하고 원주민들과 동화정책을 강조했다. 그러나 계약법보다 방아쇠가 앞서 양측은 투쟁으로 이어갔다. 잭슨은 평생 동안 원주민 축출을 고안하고 대통령 임기 중 법안을 강행했다.

 

1830년 5월 26일 잭슨을 지지하는 상원의원들은 원주민 축출법을 통과시키고 잭슨은 구두로 내각들에게 원주민 땅을 매입하고 그들에게 미시시피 서쪽 영토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잭슨의 암시를 받은 내각들은 원주민 추장들에게 적은 돈으로 뇌물을 주고 원주민들의 땅을 차지하는 계약을 받아냈다.

 

영문도 모르는 원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던 땅에서 쫓겨나가야 했다. 저항을 하면 총질과 방화로 해결하기 때문에 1830년 겨울 미저리주의 토착원주민 1832년 미저리주 치카소원주민과 조오지아주 크리크원주민과 플로리다주 세미놀원주민 1835년 조오지아주 체로키원주민이 축출당했고, 일부 세미놀 전사들은 1835년부터 1842년까지 백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1842년까지 12년간 10만 명 이상의 원주민이 유타주로 축출당했고 동사나 아사나 질병으로 15,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그들은 하루에 10마일을 이동했고 그들이 걸어간 길의 총 길이는 8120 KM나 되었다.

 

현재도 이 길들을 찾을 수 있다. 백인들에게 쫓겨가며 흘린 슬픈 눈물을 표현하여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7년 미 의회는 이 길을 미국 역사의 길이라고 명명하고 원주민 희생자들의 위령을 기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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