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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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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3)-1812년 전쟁 전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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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땅이 먼저다

미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계속 이주해오는 유럽인들을 위한 토지팽창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신세계에서 개간능력만 있으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토지를 소유 못한 백인남성은 여성과 원주민 및 흑인과 함께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세습은 누구든지 능력에 따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민주자본주의를 일으켜 미국은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강대국이 되었다.

1812년 이전에 영토팽창을 주장하는 미 서남부의 민주공화당 의원들은 제퍼슨의 루이지에너 지역 매입 이후 미국 남단은 멕시코만으로 북부는 캐나다국경으로 남북이 막혀 토지소유의욕을 서부개척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었다.

서부개척은 땅 내주기를 원치 않는 원주민들의 심한 반발로 인해 투쟁으로 이어져야 했다. 인디에너주를 비롯하여 미 중서부의 원주민은 캐나다를 통해 영국의 무기 및 군수품을 보급받아 그들의 땅을 빼앗는 미국 정착인들을 공격할 수 있었다.

포터 상원을 비롯한 남부 및 서부지역의 민주공화당 상원들은 캐나다를 접수하여 국토를 넓히고 영국을 미주에서 축출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1803년부터 나폴레온 전쟁으로 캐나다에 소수 군대만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퍼슨은 5대 호수를 차지하는 상위캐나다는 미군이 진격하면 저항 없이 미국의 한 주가 될 것이라 믿었다.

국민들의 힘을 받은 미 상하원 다수결로 매디슨은 1812년 6월 18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제임스 먼로 미 국무부장관은 캐나다침공은 영국을 축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프랑스 인디언전쟁과 미 독립전쟁을 거처 세 번째 캐나다 침공을 개시했다.

미국으로서는 세계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과의 전쟁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캐나다 침공 외에는 별수가 없었다

 

땅을 잃는 슬픔

1492년 컬럼버스가 미 신대륙을 발견한 당시 북미주에 약 7백만 명의 원주민이 거주했다고 제임스 윌슨 역사학자는 추산하고 있다. 그들은 각 지역에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의 정착인들을 접하면서 천연두와 유럽의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인구가 30% 이상 감소했다. 그들은 정착인들에게 거주할 땅을 내어주며 교역을 했다. 그리고 이해관계로 백인들간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1754년부터 1763년까지 프랑스 인디언전쟁에서 이로코아원주민연합은 영국을 위해 싸웠고, 와바나키원주민연합은 프랑스편이 되어 들러리 전쟁을 치러야 했다. 1776년부터 1783년까지 미 독립전쟁 중에는 캐나다와 미국 13주 지역 근처에 거주하는 인디언 부족들로 갈라져 오넌데가를 포함한 9개의 부족은 영국편을, 오나이더를 포함한 12개의 부족은 미국편을 들어 전투에 가담했다.

전쟁이 끝나면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땅 욕심에 휘말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주로 위스키와 총기로 바꾸어야 했다. 가격으로 따지면 1에이커당 2센트도 안되어 이를 반대하면 총으로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미 서부개척인들과 곳곳에서 총격전이 발생하다가 점점 잔인한 대량학살로 변질되어갔다.

학살이 끝나면 결국 땅을 강탈당하는 슬픔을 지켜본 추장들은 피눈물 나는 투쟁을 감행해야 했다. 이에 불타는 혜성으로 알려진 샤니부족의 테컴서(1768-1813) 추장은 독립전쟁이 끝난 후 와바쉬인디언연합을 대표하여 수많은 백인 거주지를 공격하였다.

그는 1795년 미국에게 오하이오 북서부지역을 내주는 그린빌조약을 반대했고 인디언예언자로 알려진 그의 동생 텐스크와타(1775-1836)와 함께 1805년 오하이오주 그린빌에 정착하여 전사들을 훈련시켰다. 텐스크와타의 영향으로 많은 부족들의 의용군이 모여들어 인디언 총연합군을 결성할 수 있었다.

1811년 7월 테컴서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인디에너 주지사와 토지소유권에 대한 담판을 위해 두 번째 인디에너주 빈센스에 갔다가 협약대신 전투로 대응하게 되었다.

테컴서연합군의 세력이 더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리슨은 1811년 11월7일 테컴서가 부재하는 동안 프로펫 부락을 공격하여 폐허를 만들었다. 다음날 폐허를 목격한 테컴서는 비통에 빠져 땅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지속적인 테컴서전쟁을 결심했다.

그가 세우려는 인디언 자치국을 유럽에 알리기 위해 테컴서는 캐나다를 통치 하는 영국과 연합을 맺는 전략을 세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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