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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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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9)-미 독립전쟁 전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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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777년 9월 19일 영군이 프리맨농장의 전장을 점거했어도600여명의 영군희생자 보고는 버고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미군의 희생자는 300여명이었다. 뉴욕시에 본부를 둔 헨리 클린턴 영국군이 10월초 버고인군과 합세하기 위해 9월22일 출정한다는 내용의 12일자 편지를 받은 버고인은 21일 공격명령을 보류하고 10월초까지 큰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벌려 했으나 모건 장총부대의 계속적인 저격은 영국장교들의 악몽이 되었다.

또한 린컨 소장과 브라운 대령은 티콘도로가 요새의 영국군 후미를 공격하여 29일 포위를 당한 버고인은 식량과 보급이 완전히 끊겨 진퇴양란에 빠졌다. 요원한 헨리 클린턴 구원병 소식을 기다릴 수 없어 버고인은 10월 3일 참모회를 열고 총공격작전을 세웠다.

헨리 클린턴 구원병은 10월 6일 새라토가 남쪽에 133 km 떨어진 클레먼트에 도착했으나 민병들의 공격을 받으며 진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이츠와 아놀드 분쟁

게이츠 사령관이 상원에 올린 프리드맨농장전투보고서에 아놀드의 혁혁한 전공을 빠트려 아놀드와 그의 부관들의 분개심을 일으켰다. 작전 능력이 서로 다른 아놀드와 게이츠는 언쟁에서 큰소리치는 분쟁으로 변했다.

전투 중 후방에 서 명령만 내리는 게이츠는 언제나 전방에서 용맹을 떨치는 아놀드를 린컨 소장과 교체했다. 화가난 아놀드는 워싱턴군으로 재영입하기를 원하여 아놀드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비머스 하이츠전투

10월7일 오전 10시경 전투력 있는 5,000여명의 영국군은 밀물처럼 늘어나는 13,000여명의 미군병력에 비해 반도 안되었지만 버고인은 헨리 클린턴 구원병을 포기하고 미군 좌측을 향해 정찰대를 보내며 프레이저 준장의 선발군을 영군 우측에 독일용병군을 중앙에 영국정규병군과 포병대를 영군좌측에 포진하여 비머스 하이츠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1km 정도 행군을 한 버고인이 미군의 동태를 파악할 때 게이츠는 린컨 소장을 미군우측에 러니드준장을 중앙에 자신은 본부진영에서 미군좌측을 맡아 푸어 준장의 군을 앞세우고 모건저격대를 왼쪽 숲 속 깊숙이 배치하였다.

게이츠는 총 8,000여명의 미 연합정규군과 의병군이 영군의 접근을 기다리게 하였다. 오후 2시경 영군의 총성이 울리며 미군좌측을 공격했지만 고지 위에서 역공격하는 푸어군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었다.

애클랜드 소령이 이끄는 영 보병대가 육박전으로 다가올 때 푸어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영 보병대는 애클랜드와 함께 사살당하거나 흩어져야 했다. 영군선발대를 이끌던 프레이저는 모건군의 저격으로 쓰러지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버고인은 모건 저격대로부터 총격을 받고 겨우 살아났다.

4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버고인은 영군의 보루 북쪽진영으로 후퇴했다. 미군은 약 200명의 희생자를 기록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아놀드가 수비를 우선으로 하는 게이츠의 군대를 이끌고 브라이어맨 독일 용병과 캐나다의용군이 수비하는 2개의 보루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영군을 쓰러트렸다.

아놀드의 용맹으로 미군은 브라이어맨이 수비하는 첫 번째 보루를 탈취했고 아놀드군에 합류한 모건의 저격대는 원거리에서 브라이어맨을 쓰러트렸다.

게이츠와 결별하고 워싱턴군으로 전근하기로 한 아놀드가 전장을 떠나지 않고 되돌아와 게이츠의 허락없이 용맹을 떨쳤지만 총격을 받은 말과 함께 쓰러지며 말 밑에 깔려 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들것에 실려갔다.

보루를 점령당한 독일용병들이 재집결하여 공격을 시도 했지만 날이 어두워져 다음날로 미루어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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