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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2)-미 독립전쟁 전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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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주몬빌을 비롯한 프랑스 사절단을 암살한 워싱턴과 영국 식민지 민병대가 프랑스계 캐나다 군대에게 항복한 후 목숨만 구하고 돌아간 사실이 유럽제국에게 알려져 영국은 유럽국가들에게 조롱감이 되었다.

따라서 1755년 영국은 오하이오 협곡 서쪽을 차지한 프랑스계 캐나다군을 퇴치하기 위해 에드워드 브래독 중장이 이끄는 영국 정규군을 파병하였다. 브래독은 그곳 지형을 잘 아는 22세의 워싱턴을 계급없는 부관으로 삼고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워싱턴은 브래독에게 대령의 계급을 요청했다가 비웃음으로 거절을 당했지만 콧대높은 영국 사령관의 전략을 배우기 위해 부관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브래독은 영국의 유럽 재래식 전략으로 숲이 지고 협곡이 위험한 오하이오 지역을 공병대로 길을 닦으며 진군하였다. 워싱턴은 나무 뒤나 바위에 숨는 인디언의 기습작전에 준비해야 된다고 조언을 했다.

프랭클린도 워싱턴의 경험을 존중하라 했지만 콧대높은 브래독은 대영제국의  정예군과 오합지졸의 식민지 민병대와는 다르다고 코웃음 치며 대포 및 중장비 운반을 고집하였다.

하루에 고작 2마일의 행군은 험한 계곡에 봉착하여 말과 군인들이 지쳐 죽어 넘어가자 브래독은 워싱턴의 조언대로 3800명 중 800명을 선봉대로 보냈다. 6월이 되면서 워싱턴은 이질에 걸려 후미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7월 겨우 비틀거리며 회복이 되어 브래독을 도와주었다. 7월 9일 1400명의 선봉대를 세 편대로 나누어 모노가엘라강을 건넜다. 워싱턴은 브래독이 이끄는 편대에서 진군하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나타난 인디언들의 공격으로 놀랜 영국군은 신출귀몰하는 인디언 저격병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릴라식 각개전투 방법을 명령받은  워싱턴 민병대는 워싱턴의 지휘 아래 용감하게 싸웠지만 영국군들은 도망을 하거나 서로를 인식 못해 서로 총격을 가하기도 하여 영국군 2천여 명이 사살되고 부상을 입었다.

 총격을 받은 브래독이 쓰러지자 워싱턴은 그를 마차에 태웠다. 중상을 입은 브래독의 명령으로 전령이 된 워싱턴은 12시간 말을 타고 전투임무를 완성하면서 타던 말 두 마리가 총탄에 쓰러지고 그가 착용한 모자와 외투에 4개의 총알이 지나간 흔적이 나타나, 후에 워싱턴은 불사조 영웅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브래독은 죽음을 맞이하며 23세 된 워싱턴의 전략과 용감성을 유럽에 알렸다.

영국이 오하이오 협곡 전투에서 대패한 후 영국과 프랑스는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전쟁을 일으키며 캐나다를 포함하여 더 큰 이득관계가 있는 인도와 캐리비안 동남아시아 유럽 등으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763년 7년 전쟁에 승리한 영국은 파리조약에 의해 오하이 협곡은 물론 캐나다  전체를 차지하는 캐나다를 영연방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캐나다를 양보하는 대신 설탕 수입이 좋은 케리비언의 쿠아다루프섬을 차지했다.

 

워싱턴이 받은 교훈

워싱턴은 주몬빌 특사를 간접적으로 학살당하게 한 후 프랑스군에 포로가 되어 항복서에 서명한 치욕적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후에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는 싸우다 서서 죽는 것이 낫다’라는 자신의 평생교훈을 만들고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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