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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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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6)-알렉산더 해밀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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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호에 이어)

 

국가의 빚은 갚을 수만 있다면 국가의 축복이다.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은 1789년 9월11일 워싱턴 미 초대 대통령에 의해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연방국채 해결 및 경제개발로 미국식 자본주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정확히 212년 후 2001년 9월 11일 빈 라덴은 9.11테러공격으로 세계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시를 강타했다.

 

연방국채

워싱턴이 천재적인 문제 해결사 해밀턴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이유는 신생미합중국의 부채해결과 경제개발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이 계산한 주정부의 부채와 총 연방의 국채는 정확히 5412만4 464달러였다. 그 당시 미국인의 일인당 연수입은 약 165달러였다.

 

국민 총생산 6억 48 32만여 달러의 약 8.3%가 되는 연방국채는 주로 독립전쟁의 전비로 인해 생긴 빚으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제국에 대한 부채가 1,100만여 달러 나머지는 국내 빚이었다. 참고로 2019년 미국의 총생산 대비 국채 비율은 118 %가 된다.

 

중앙은행

그 당시 연방정부 채무에 대한 해결책은 채무불이행을 하던지 세금으로 이자와 원금을 갚는 것이었다. 모두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워싱턴과 함께 독립전쟁 중 군 자금난으로 심한 고통을 겪은 해밀턴은 영국의 금융제도를 연구 중앙은행 제도를 도입하여 빚을 화폐를 찍어 갚고 경제를 일으키는 정책을 세웠다.

 

즉 중앙은행이 미국의 새로 발행하는 국채를 구입하게 하고 그 돈으로 전쟁 빚을 갚고 연이자 5% 국채 이자를 중앙은행에 지불하는 것이었다. 국채는 사설 중앙은행뿐 아니라 일반인도 매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은행제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립군들이 전쟁시 봉급으로 받은 미연합지폐가 인플레로 휴지조각이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연방정부가 100% 원래 가치를 보증했고 연방정부의 신용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합중국의 확고한 경제성장에 의한 국가세입으로 국채를 갚을 수 있다는 해밀턴의 신념과 워싱턴의 국민을 위한 건국애국심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은행의 금융체제를 반대하는 제퍼슨 및 메디슨과 치열한 분쟁을 벌이면서 해밀턴은 워싱턴의 인가를 받아내어 1791년 사유재산소유의 미합중국중앙은행 (National Bank of United States or First Bank of United States)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중앙은행구조는 현재 미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되어 미 달러로 하여금 세계기축통화의 자리를 지키게 하고 있다

 

제조업 육성

해밀턴은 토마스 페인의 상식론에서 미 신대륙의 풍부한 자원과 대지는 유럽인들의 선망이 되어 수많은 이민자로 미 대륙 인구증가가 불가피하다는 예견에 동감했다. 실제로 1790년 393만명의 인구는 1840년 1,710만명 즉 연 6 % 인구 증가를 초래했다.

 

또한 잔 로크의 사유재산소유가 미 헌법에 보장되어 누구든지 일을 하면 토지소유 및 재산을 축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럽 평민들에게는 신세계 꿈이 되었다. 해밀턴은 이 사실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노동 분할 및 자유개방시장에 의한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이론을 도입하여 남부의 농업과 북부의 공산품제조업 육성정책으로 남북간에 상업을 일으키고 수입관세를 올려 국내 제조경쟁력을 키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남부에서 생산되는 농산품 주로 목화를 유럽에 수출하는 것보다 사업가들로 하여금 유럽의 기능공들을 이주시켜 섬유를 제조 수출하여 더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정책을 장려하였다. 이 과정으로 인한 인프라구축 부수 제조사업 및 직업창출로 신생 미국은 부국이 되어 강한 군대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국부론정책을 현실화 시켰다.

 

주류세와 위스키반란

관세만으로는 국가세입이 충분하지 않아 해밀턴은 1791년 수입되는 주류는 물론 농가에서 담가먹는 위스키에도 주류세를 부과하였다. 이에 반기를 든 농민들은 세무원과 유혈충돌을 일으켰으나 끝내 워싱턴이 지휘하는 군대로 폭동을 진압하고 해밀턴은 위스키세를 부과시킬 수 있었다. 또한 동년 밀수를 방지하기 위해 해안경비대를 설립했다.

 

미국최초의 금화       

독립전쟁시 미연합은 주로 스페인 금화 페소를 화폐로 사용했다. 해밀턴의 보고서에 의하여 미 상원의 가결로 워싱턴 정부는 1792년 최초의 금화 달러를 스페인 페소와 환율 1:1로 찍어냈다. 금과 은의 가치를 15:1로 책정한 금은 양본위제도를 채택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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