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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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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돈 이야기(11)-종이돈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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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 the Government devalues the Money in order to betray the holders,
you politely call this procedures Inflation. (George Bernard Shaw)

 

 정부에서 발행하는 종이돈은 국가에서 국채로 보증하는 신용장이다. 한때 금본위제도에 의한 지폐는 지폐가치만큼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금 대신 은이나 국가토지를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 

 


▲쟌로

 


 쟌로(John Law, Economist, 1671-1729)는 1671년 4월 21일 스코틀랜드 에딘버르에서 부유한 금세공 은행가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부터 은행사업을 배우며 부친을 도왔다. 17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난 뒤 그는 은행사업보다는 투기성 사업에 관심을 두고 은행사업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그는 런던에서 도박과 여자를 좋아하는 플레이보이로 지내다가 어느 날 삼각관계 남과 다투어 결투를 하게 되었다. 도전장을 받은 그는 한칼에 상대를 살해하고 살인죄로 체포당했다. 사형선고에서 감형받고 수감되었다가 감옥소에서 탈출하여 암스테르담으로 피신했다.


 그는 조국에 돌아와서 금, 은, 토지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국립은행의 은행권 발행을 제안했으나 스코틀랜드정부는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는 지폐는 상품교환수단에 불과하다고 믿고 국립은행을 세워 금, 은, 토지 가치만큼 지폐를 발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 최초의 국립은행설립을 창안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를 오가며 국립중앙은행 설립을 제안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파리 저택에 자리를 잡고 그의 사업계획을 알리기 위해 오얼린스 공작을 포함하여 프랑스 귀족들을 틈만 나면 파티에 초대하여 여흥을 베풀고 교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당시 프랑스 루이14세는 영국과 전쟁으로 인한 전비충당으로 심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다. 루이14세가 사망한 후 1716년 5월1일 오얼린스 공작의 주선으로 쟌로는 영국전쟁에 이어 스페인전쟁에 국고를 탕진하다 시피한 프랑스왕정에 국립중앙은행설립과 지폐발행의 제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성공적으로 그의 금융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첫째 계약조건은 그가 설립한 사설은행(BANQUE GENERALE)에 투자가들이 현찰과 가치없는 프랑스국채를 1대3의 비율로 투자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의 사설은행이 프랑스 왕궁의 금화가 받혀주는 지폐발행권을 허용받는 것이었다. 프랑스왕궁이 필요한 지폐의 양을 충당하기 위해서 쟌로는 1719년 북미주 미시시피 척산회사(MISSISSIPI COMPANY)의 주식을 이용할 수 있는 통치독점권을 받고 그의 은행에 합병시켰다.


 그 당시 미시시피 척산회사는 미국에 루이지아나(LOUISIANA)를 차지하여 미국보다 더 큰 영토를 갖고 있었다(지도참조). 루이지아나에서 생산되는 금, 은 제반 농상품들을 유럽에 교역하여 프랑스왕궁은 물론 국민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게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주식을 공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루이지아나의 토지와 생산품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고 국채를 사들여 프랑스에는 돈이 돌기 시작하여 국민들은 부자의 꿈을 꾸고 미시시피 척산회사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719년 500 리브레(LIVRE)에 나온 주식가치가 동년 12월 31일 1만 리브레로 수직 고공하여 가난뱅이도 백만장자 꿈을 갖고 투자에 가담했다.
 백만장자(MILLIONAIRE) 어원은 여기에서 나왔다. 투자에 필요한 지폐의 수요만큼 계속 지폐를 발행하여 종전보다 거의 두배가 되는 시중화폐가 시장에 돌자 식료품과 생활비가 두배로 오르기 시작했다.


 1720년 1월 약삭빠른 일부 투자가들은 현금을 금화나 은화로 바꾸기 시작했다. 환전 위기를 느낀 쟌로는 100리브레 이상 양화로 바꾸지 못하게 법령을 내렸다. 루이지아나 지역에서 금은이 나지도 않고 토지도 가치가 없어지자 소문은 퍼져 1720년말 주식은 일년만에 1천 리브레로 폭락했고 다음해엔 500리브레로 반토막이 되었다.


 프랑스경제는 파탄을 맞고 경제학자들은 이 사건을 미시시피 버블( MISSISSIPI BUBBLE)이라고 부른다. 국민들의 성난 봉기를 피해 쟌로는 여자로 분장하고 파리를 떠나 유럽을 방황하다 1723년 런던에 머물러 4년을 살다가 베니스로 옮겨간 후 끝내 재활하지 못하고 가난과 싸우다 172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론


 생산이나 무역 등 경제활동 없이 지폐를 발행하면 인플레가 되어 경제침체 및 파탄이 온다. 설사 루이지아나에서 금과 은을 채취했다 해도 프랑스는 스페인이 경험한 경제침체(지난 칼럼 ‘금의 저주’ 참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0년이 지난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종이 달러로 미국 금과 바꾸지 못하게 법을 통과시킨 후 미연방은행은 계속 종이지폐를 남발하다시피 발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현재까지는 미국경제 성장이 달러를 받혀주고 세계기축통화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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