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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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들
daekim

 

 오래 전에 어느 신문에 “삶을 체념한 사람들”, “날마다 죽은 사람들“, ”승리하는 사람들“,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사람들에 관한 글을 쓴 일이 있다. 처음 세 종류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로서,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관찰한 글이고, 마지막 것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한 어느 남녀의 모습을 그려본 글이었다.

갑자기 거의 30년 전에 썼던 사람들에 관한 글들이 생각난 것은 매일 공원을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아깝게 여겨지는 사람들에 관해 써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기 때문이다.

40년 이상을 매일 걷기 운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별로 없다. 나와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내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지나가곤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지만 마주치는 회수가 늘어감에 따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는 이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휠체어에 열두어 살 되어 보이는 소년을 태우고 다니는 흑인 남자였다. 어린아이가 탄 유모차를 밀며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다. 노약자들이 탄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간병인들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거의 사춘기에 들어선 소년이 앉아있는 휠체어를 밀면서 공원을 걷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처음 몇 번은 무심히 그들을 지나쳤다.

어느 날 그들이 내 옆을 지나가면서 휠체어를 탄 소년이 흑인 남자를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부터 그들 부자를 눈여겨보며,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까지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소년은 정신박약자인 것 같지는 않았고, 사고나 병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거나 다리를 다쳐 걷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피부색으로 판단하건대 아버지는 흑인이지만 어머니는 백인계통의 여자로 여겨졌다. 한 번도 그녀가 그들도 함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는 그들과 함께 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같은 추리가 옳다면 아버지인 흑인 남자는 사춘기로 들어설 나이가 된 불구의 아들을 데리고 살며, 걸을 수 없는 그를 휠체어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시켜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혼자서는 기동할 수 없는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상당 시간을 공원을 걷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자신의 사회생활이나 인생 자체까지 희생할 수 있다는 각오가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 소년이 언제, 어떻게 걸을 수 없는 불구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평생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년을 두 발에 무거운 쇠 덩어리를 달고 달리기 경기에 참가한 불행한 경기자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난 그 소년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중도에서 경기 자체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남들처럼 달릴 수 없음은 물론 걸을 수조차 없다는 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를 때마다 무거운 자기를 들어 휠체어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시켜 주던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과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격려의 말을 되삭이며 약해지려는 자신을 채찍질 하며 살아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수가 많고 우수한 무장을 갖춘 군대를 보유한 나라가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게 성서의 가르침이다. 이는 비록 불구의 몸일지라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더불어 “너는 해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사랑의 격려를 받으며 달리는 인생 경주자는 승리의 면류관을 획득할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이런 귀한 진리를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며 공원을 걸어가는 사랑의 아버지와 불구의 아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공원 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람들은 나이 드신 중국인 부부다. 일주에 한 번 정도 만나게 되는 이 노부부는 언제나 커다란 검은색 쓰레기 백을 가지고 다닌다.

한때 내가 걷는 공원에는 큰 깡통이나 비닐 백을 들고 다니며 숲 속에 들어가 달팽이를 주어 담는 사람들이 상당이 많았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달팽이를 줍던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알고 보니, 공원에서 산나물이나 고사리를 뜯으면 벌금을 물리는 것처럼 달팽이를 잡는 이들도 단속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그들 부부가 쓰레기 백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나물을 뜯거나 달팽이를 잡기 위함이 아니었다. 공원 산책로는 물론 숲 속에 버려진 종이컵, 빈 깡통, 깨진 유리조각 등 각종 쓰레기를 주워담으며 공원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다니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공원(난 내가 걷는 공원을 “나의 공원”이라 부른다.)은 시에서 관리를 가장 잘 해주는 공원 중의 하나이며, 휴지나 쓰레기를 버리는 통들이 여러 군데 놓여있다. 그런데도 휴지나 다 마신 커피 컵 등 온갖 쓰레기를 여기저기 함부로 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남은 음식들을 피크닉 테이블 밑에 버리고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먹다 남은 음식들을 그대로 두고 빈 그릇들만 챙겨 들고 자리를 뜨는 이들도 있다.

공원마다 환경미화원들이 있어 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이 더럽혀 놓은 것을 청소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노부부는 이런 곳들을 찾아 다니며 널려있는 쓰레기들을 모아서 버림으로 나의 공원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해주는 모범시민 상을 받을 봉사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들이 나를 위해 또는 상을 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위한 자연환경을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하는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공원 구석구석에 숨겨진 쓰레기를 찾아내 버릴 뿐 아니라 치우지 않고 버려진 개똥까지 주워다 버린다. 개를 데리고 공원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들의 개가 실례를 하면 장갑을 끼고 가지고 다니는 비닐봉지에 주워담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러나 숲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고 산책로에서 일을 보게 하고는 태연하게 가버리는 이들도 간혹 있는 것을 나만이 보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수준 이하 사람들이 일등 문명국인 캐나다에도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운 행위를 뒷수습해 주는 노부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걷기 운동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난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한 사람인지, 아니면 부부인지, 같이 걷는 친구들인지 또는 가족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은 그네들의 행위가 나의 공원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며 기쁘고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의 공원의 제1코스(내가 정한 산책코스로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로 들어서서 조금 가면 오른쪽에 3미터 정도의 소나무가 있다. 최근 몇 년간 해마다 12월이 되면 이 소나무에 누군가가 성탄장식을 해놓고 있다. 반짝거리는 전등들을 빼놓고는 성탄나무가 갖추어야 할 거의 모든 장식들을 다 해놓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 나무를 지날 때면 또 한 번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눈 내리는 밤 북극하늘에서 썰매를 타고 오시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맞이하던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하게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지라도 나의 공원의 어린 소나무에 누군가가 해놓는 성탄장식을 보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해마다 12월에 쓸쓸해질 수도 있는 겨울공원에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그 사람은 분명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일 것이다.

금년에는 유별나게 날씨도 춥고, 유난하게 눈도 많이 내렸지만 매일 아침 나의 공원을 걸으며 어느 아름다운 사람이 장식해 놓은 성탄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감사하곤 했다.

반세기 전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 비해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나라의 모든 체제와 정책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와 생활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이런 변화들보다 더 안타깝고 서글픈 현상은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거기 따라 마음과 마음도 합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난 날마다 나의 공원을 걸으며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감사한다. 아무리 세상이 혼란하고 힘들어 질지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싸늘해지며 강퍅해 져도 적은 무리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결코 어둡고 절망적인 곳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나라 전체가 공원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잘 정돈되고 다듬어진 나라다. 그 안에서도 정식으로 공원으로 정해진 곳들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가 캐나다다. 그 많은 공원들을 찾은 사람들 중에는 나의 공원에 오는 사람들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찌 공원뿐이겠는가. 이 나라의 각계각층마다 또 캄캄하고 음침한 곳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 묵묵히 그들의 몫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살만한 곳일 수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s ist eine freude zu le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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