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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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생애(1)-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모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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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10)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일가의 총 수는 70명 이었다. 요셉의 주선으로 가나안과 애굽의 국경지대인 나일 강 삼각주에 위치한 고센에 정착한 그들은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우선 가나안에서는 계속되는 흉년으로 굶주리며 지내야 했지만 고센에 와서는 양식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고센 땅에는 비가 많이 내려 목초가 풍부하여 그들의 주업인 목축업을 하기에는 적합한 지역이 그 곳이었다. 거기다 정착해 살고 있는 애굽 인들도 없는 곳이었기에 그들을 거기서 그들의 민족성을 유지함은 물론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며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신 언약이 실현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한 사탄의 도전이 시작되니 고센 땅에서 날로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압박을 가하는 애굽의 정책이 그 시작이었다.

요셉이 죽은 후에도 야곱일가는 고센 땅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며 무사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주어지던 혜택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새롭게 들어선 왕조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이방족속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성경 외의 문서들에 의하면 기원 전 1730년부터 1570년까지 애굽을 지배한 학소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신왕국 시대”로부터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되어있다. 신왕국의 투트모스 3세 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에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의 수가 너무 많고 강하여 애굽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강제노역을 시키며, 국가 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다.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야곱의 후손들은 이 같은 엄청난 변화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애굽을 흉년의 위기에서 구해내어 번영시킨 요셉의 공로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정권 밑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견디기 힘든 중노동과 가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하여 불어나자 애굽 왕은 히브리 여인들이 해산할 때 아들이면 죽여 버리라는 특명을 산파들에게 내린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애굽 왕이 이 같은 밀령을 내린 이면에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고 한다. 즉 어떤 현인이 애굽 왕에게 히브리 사람 중에서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날 텐데 그 아이가 자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면 애굽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진언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스라엘 민족의 급속한 증가를 염려하던 애굽 왕은 그 말을 듣고는 태어나는 히브리 남아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다. 애굽 왕의 결단은 후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근방에서 태어난 어린 남자 아이들을 살해한 헤롯 왕의 만행을 생각하게 한다. (마 2:1-18)

애굽 왕은 고센 땅의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가나안으로 돌려보냄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육십 만에 달하는 히브리 장정들의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특명을 받은 십브라와 부아가 어떤 여인들 이었는가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록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이 믿고 신임하는 산파들이었을 것이며, 임무를 잘 수행하면 상당한 대가를 보장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받는 히브리 남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네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왕명을 거역한 까닭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들려주고 있다. 이는 십보라와 부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의 법도를 존중히 여기는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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