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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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71주년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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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1년이 지났다.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할 수 있는 세월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들은 전쟁으로 깨어지고 상처받은 가슴을 지닌 채 폐허처럼 되어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도시마다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거미줄처럼 전국으로 연결된 도로들마다 자동차들의 행렬이 물결치고 있으며, 반만년 역사를 통해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던 “가난”도 사라졌다.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도움을 받기만 하다 도움을 주는 나라로 격상했다. 우리들의 합쳐진 힘이 라인 강의 기적을 능가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며 우리나라를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하나로 우뚝 서게 만든 것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난 71년 전에 일어나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이 남겨준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

1950년 6월 25일, 주일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응접실에 자주 드나들던 낯익은 친척들이 모여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넷째 형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속삭였다. 전쟁을 병정놀이 정도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근심에 쌓여있는 어른들이 이상해 보였다. 그렇지만 26일 저녁부터 들릴 듯 말 듯 하던 대포 소리가 점점 크게 내 귓전을 때리기 시작하자 내 어린 가슴에도 짙은 불안과 공포가 찾아 들었다.

하루가 더 지난 27일 자정 경에 우리는 피난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작은 쌀자루가 담긴 배낭을 메고 할머니의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으면서 난 한없이 두려워졌다. 더디기만 하던 피난민의 행렬이 멈춰서면서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자 아버지와 큰 형은 수영을 해서라도 강을 건너보겠다며 떠나갔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튿날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식구들을 마당으로 모아 놓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큰 형의 행방을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 중에 하나가 장총을 내 가슴에 들이대고 “네 아비 어디 갔느냐?”고 소리쳤다.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재빨리 나를 밀쳐내며 “쏘려거든 나를 쏘라.”며 막아서자 그는 할머니를 총구로 밀어 쓰러트렸다. 그 순간 내 눈에 비친 그의 얼굴은 주일학교 선생님이 보여주었던 그림 속의 마귀보다 더 험하고 무서웠다.

7월 16일에 용산 지역의 괴뢰군 진지를 목표로 한 유엔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있었다. 울리는 공습경보에 방공호로 뛰어 들어간 순간 난 귀청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 묻혀버렸다. 필사적으로 흙 속에 묻힌 나를 꺼낸 넷째 형에게 안겨 정원으로 나오니 딸기밭에 엎드려있는 식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200평이 넘는 넓은 정원에는 각종 꽃나무와 과일나무들이 무성한 “녹색의 장원”으로 알려진 우리 정원에서 난 전쟁이 무엇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가슴 두 곳에 파편을 맞아 인사불성이 된 둘째 형과 할머니를 고모 집에 남겨놓고 우리는 또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덕소 근처의 글개울이란 시골 마을에서 호박죽으로 연명하며 70여 일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낸 하루하루를 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선상에서 쏘아대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한발 한발이 “조국을 짓밟아 온 원수의 무리들”을 섬멸해 달라고 기원하면서, 서울에 계시던 할머니도 함포사격이 진행될 때 둘째 형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리는 죽어도 좋으니 더 많이 쏘아 공산군을 몰살시켜 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거의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 높이 솟아있던 잣나무들, 새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어야 할 감나무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집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있었다. 공산치하에서 90여 일 간 체험한 그들의 만행과 그 후 또다시 대구, 마산, 부산을 떠돌며 피난생활을 한 쓰라린 기억들을 나열하자면 책을 몇 권이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짧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6.25을 통해 우리는 공산주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인류의 적인 것을 확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잔인하고 악랄하며, 간교하고 비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불의한 무리임과 동시에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자유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목숨을 건 투쟁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임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도 6.25의 체험을 통해서다. 대한민국의 체제와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젊은 용사들이 수류탄을 뽑아 들고 적의 탱크에 뛰어올랐으며, 폭약을 안고 육중한 탱크에 깔려 산화하였는가를 상기하면 이 사실은 자명해진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로 뭉치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조국을 지킬 수 있음도 6.25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T. S. Eliot는 <The Waste Land> (황무지)의 서두에서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말했다. 난 1950년 6월은 “우리 역사상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난 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체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주신 축복이라 믿고 싶다.

부모 형제 자매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전쟁을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적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대한민국의 주적의 정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줄 안다. 그래야만 우리 강토에 잔인한 6월이 찾아오는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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