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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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생애(6)-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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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복을 주고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18)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를 향해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참으로 슬프고 쓰라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가나안에 찾아온 흉년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애굽으로 들어갔기에 애굽 여인 하갈이 사라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동침하여 생긴 아들이 이스마엘 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은 아브라함의 불신앙과 불복종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아픈 가슴을 달래며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 보낸 것은 모든 것을 남겨 놓고 고향을 떠난 결단에 버금가는 순종의 믿음 때문이었다.

 

둘 다 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임하는 까닭이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나온 하갈과 이스마엘은 빵과 물이 다하여 아사 직전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은 광야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애굽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며 열두 아들을 낳아 그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창 25:12-16)

 

하갈과 이스마엘이 떠나고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머물고 있을 때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찾아온다. 처음 그랄 땅에 들어왔을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두려워하는 입장이었다. 그 땅의 통치자인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기 위해 그를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장관까지 데리고 찾아와 아브라함에게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의한 것이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을 만난 그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도다.”(창 21:22)라 말한 사실은 이를 증명해 준다. 아비멜렉이 제안한 평화조약은 그들의 자자손손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드리면서 그가 판 우물을 그랄 사람들이 빼앗은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 그 당시 우물은 유목민들에겐 엄청나게 귀중한 재산이었다.

 

그런데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이 그 곳에서 힘들게 판 우물의 소유권을 놓고 그랄 사람들과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비멜렉은 거기 관해서는 아는 바 없다며, 아브라함이 주는 완전함과 불변성을 상징하는 숫자인 일곱 마리 암양 새끼를 받고 그 우물이 아브라함의 것임을 확인해 준다.

 

이처럼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아브라함은 그 곳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이라 이름 한다. 그리고는 브엘세바에 사막에서 제일 생명력이 강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아비멜렉과 동맹을 맺은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그대로 머무른다. 신변의 위험도 없어졌고, 그 곳 주민들이 그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물로 대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창 22:2)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다. 사반세기를 기다려 얻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생명을 불어넣은 인간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요구였다.

 

그뿐 아니라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도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삭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스스로 하셨고, 또 실현시켜 주신 언약을 깨뜨리시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발드윈(Joyce G. Baldwin)이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받았을 충격은 초음속으로 비행하던 여객기가 갑자기 후진하기 위해 하늘에 멈추어 섰을 때의 승객들의 놀라움보다 더 컸을 것이라 말한다. 아브라함은 칠십오 세에 하란을 떠나 백칠십오 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광야에서 숱한 역경과 고난과 시련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기쁨이요 소망인 이삭으로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보다 더 슬프고 가슴 아팠을 때는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하신 말씀의 부당함과 모순을 지적하며 불복할 수도 있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을지라도 그것을 그의 불신앙으로 간주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도전으로 여기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의 실현으로 허락하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주문은 어떤 면으로 보던지 부당하고 모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합당하지 못하면서 잔인한 명을 내리신 까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약속의 자식”인 이삭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순종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신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음을 믿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그가 이삭을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축복이 임할 것도 믿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그의 처소에서 120키로나 떨어진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한다.

 

삼일 간을 걸어가면서도 그는 한없이 번민하며 여러 번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란을 떠나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한 광야로 발을 내디딜 때처럼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산 밑에 도달하자 아브라함은 함께 간 하인들에게 그와 이삭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면서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죽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아브라함이 믿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같은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을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히 11:19)라 기록하고 있다.


 산 위에 오른 아브라함이 모든 준비를 끝내자 이삭이 묻는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란 대답은 궁여지책으로 꾸며낸 말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이삭은 자기가 제물임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이 그를 결박하여 제단 위에 눕혔기 때문이다. 십대의 소년 이삭은 얼마든지 연로한 아브라함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삭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두 손이 묶인 채 제단 위에 눕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은 이삭다운 행동이었다.

 

아브라함의 칼이 이삭을 찌르려는 순간 멈추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자 하나님께서 또다시 말씀하신다. “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은 칼 든 손을 내리면서 제단 뒤편 수풀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이삭에게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번제에 쓸 어린 양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 양을 제물로 번제를 드린 아브라함은 그 곳을 “여호와 이레”(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 부른다. 아브라함의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으며, 그들은 원수들을 정복할 것이며,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 축복해 주신다.(창 22:17-1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제물은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아니라 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이 이삭을 대신할 번제물로 어린 양을 준비하신 것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실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후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라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하나님이 이삭을 대신할 어린 양을 준비하시고, 인간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그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 진리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아니하겠느냐?”(롬 8:32)고 말해준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거둔 믿음의 승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과 “인류의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대열에 가담하는 모든 사람들도 세상의 악을 정복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그들이 받는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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