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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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편지-덥지도 차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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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며 차지도 아니하니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네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14-22)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책망의 말씀이 없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에 쓰신 편지에는 칭찬하는 말씀이 없다. 이 점을 지적하며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일곱 편지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것이 제일 슬픈 편지라 하는가 하면, 이 편지는 죽은 교회를 해부한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이 편지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들을 낱낱이 들어내시어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기대가 가득 담겨있기도 하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이름만 지녔지 실상은 죽어 있었던 사데 교회보다 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불쌍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그들이 가장 부요하고 활기찬 교회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실체를 모르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 자신의 신분을 서두에 밝히신다. 예수님이 그를 가리켜 “아멘”이라 하신 것은 그의 말씀은 가장 확실하고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지녔기에 한 번 하시면 그것이 곧 최종적인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심은 그의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이며,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절대적이시며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첫 말씀은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토해낼 수밖에 없다.”였다. 예수님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처럼 가련한 인생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사랑의 초대장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입에서 토해버리겠다고 하신 까닭은 그들이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했기 때문이었다. 뜨뜻미지근하다는 것은 “무관심함”을 의미한다. 매사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이 세상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없고, 죄악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선과 악의 경계선에 서게 되며, 그런 성도들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의 일에는 무관심 하면서도, 그들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며 벌거벗고 있으며 눈까지 먼 사실을 모르고 있다.”며 책망하신다. 라오디게아는 주전 250년에 형성된 도시로서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72키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주후 1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로마 정부가 재정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거부하고 그들 스스로 무너진 도시를 재건했을 정도로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부요한 교회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은 곤고하고 가난했다. 풍요로운 물질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많기만 하다. 그러나 어떤 부자라도 행복을 살 수는 없으며, 슬픔과 괴로움을 물러가게 하고 기쁨과 소망을 가져올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소유했을지라도 참된 믿음이 없이는 영적인 빈곤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했지만 영적으로는 누구보다 부유했던 서머나 교회와는 달리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견줄 자 없이 풍요로웠지만 영적으로는 지극히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었으며, 눈까지 멀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이었다.

 

라오디게아는 의류생산의 중심지였기에 거기서 생산되는 양털 옷감은 부드럽고 윤기 나면서도 값이 저렴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때문에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들을 헐벗었다고 하신 것은 그들은 최고 품질의 옷으로 육신을 감싸고 있었지만 영혼을 덮어줄 옷은 입지 못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거기다 그들은 눈조차 멀어있었다. 그 당시 라오디게아에서 제조되는 눈약과 귀약은 최상의 품질로 인정받아 세계 각처로 수출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을 눈 먼 장님들이라 하신 것은 그들의 눈은 땅의 것은 잘 보았어도 하늘의 것은 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의에 도취되어 있었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네의 믿음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들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가련한 존재들이다.”라 말씀하시며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볼 수 있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라 말씀하셨다.

 

어떤 고난과 박해를 받더라도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영혼을 지키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들의 영혼이 죽어가는 데도 육신의 안녕을 즐기며 뜨뜻미지근한 믿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토해내시기 전에 또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이 같이 명하는 것은 죽어가는 너희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함이니 정신을 차려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성경에는 파멸직전에서 생명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여러 명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가 다윗이다.

 

하나님은 부하 장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무서운 죄악을 지적하시며 꾸짖으신다(삼하 12:1-15). 그때 다윗이 통한의 회개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 쓸모 없이 시들어가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회생시켜 사용하시기 위해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명하시며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약속해 주신다.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언약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심과 동시에 그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충실하고 크신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약속이시다. “내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노니”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말해준다기 보다는 그를 떠나 죄악의 길로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그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예수님의 간절하고 애타는 권면이라 봄이 옳다고 여겨진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나비가 꽃을 떠나 날라가지 꽃이 나비를 떠나지 않듯이 언제나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인간들이다. 기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 길 떠나는 종교가 아닌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종교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

 

홀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에서 예수님은 굳게 닫힌 집 문 밖에 서 계시다. 그런데 그 집 문에는 문고리가 없다. 안에서 문을 열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실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가 문을 열어야만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지친 마음을 그의 위로와 평안으로 채워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이기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허락하실 그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기 원한다면 굳게 닫힌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애타는 가슴으로 문 밖에 서 계신 예수님을 모셔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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