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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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편지-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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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네가 참고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나를 생각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촛대를 자리에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리라.”( 2:1-7)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자.”하신 주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켰다. 모두들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순교의 피를 흘릴 때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만이 순교하는 대신 90이 넘어서 로마 황제 도미티안에 의해 밧모 섬에 유배되어 계시록을 기록한 후 생을 마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처럼 난해한 책은 없다고 말한다. 어느 주석가는 계시록에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기 같은 문구들이 있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정신 이상자가 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난해한 성경이 계시록이다. 이처럼 계시록을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이 책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서이기 때문이다.

 

구약에 있는 16개 예언서들에는 오실 예수님에 관한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이기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다. 그런 까닭에 이 예언서를 연구하는 성경학자들은 이 책에 기록된 내용과 상징들을 그들의 신앙관과 입장에서 각기 다르게 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계시록의 모든 예언들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친히 주신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 예언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도에 달했던 시기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극심한 핍박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성도들이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읽고 용기를 얻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온갖 시련과 역경 속에 있는 우리들도 계시록이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계 1:3)란 말씀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예수께서 영광 중에 오실 그날을 기다리는 소망을 지니고 사는 이들은 영생을 누리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이시기도 하다.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바울은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아.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일곱 별들을 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거닐고 계셨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그가 본 것과 지금 있는 것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여 보내라는 일곱 교회는 당시 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들이었다. 하지만 그때 아시아에는 그 일곱 교회들 외에도 여러 곳에 교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째서 이들 일곱 교회에게만 편지를 보내셨을까?

 

성경에 나오는 “일곱”이란 숫자는 성스럽고 완전한 수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특별한 일곱 교회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세상 모든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이 같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사도 요한이 첫 번째로 편지를 보낸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 당시 아시아의 수도는 버가모였다. 그러나 에베소는 버가모보다 더 화려하고 중요한 아시아 최대의 도시로서 “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 불려졌다. 에베소는 아시아에서 가장 교역이 활발한 항구였기에 “아시아의 시장”(The Market of Asia)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아시아의 관문이었으며, 로마로 향하는 국도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로마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도시였기에 에베소에는 로마군도 주둔하지 않았다.

 

도시 자체에 관해 살펴보면 그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으며, 글라디우스 황제와 네로 황제를 섬기는 신전도 있었다. 거기다 여러 이방종교들이 그들의 본거지인양 기세를 떨치고 있었던 도시가 에베소였다. 이같이 넓고 화려하며 여러 인종들이 모여드는 곳인 에베소에는 각종 범죄가 범람했음은 물론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부패한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이방 신전들 주변에는 많은 범죄자들이 모여들었다. 신전 구역은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일단 그 곳으로 들어서는 범죄자들은 체포당할 염려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신전 주변에는 수많은 창녀들이 모여 들어서 거기서 벌어지는 문란한 행위들은 옛날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했다.

 

이처럼 죄악이 넘치고, 타락한 에베소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자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에베소에 복음이 전파되고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이가 사도 바울이었다. 복음이 발부칠 수 없는 불모의 땅에 복음을 들고 들어와 교회를 세운 바울은 그가 선교한 어느 곳보다 오래 에베소에 머물며 성도들을 양육하며 그들의 믿음을 자라게 했다.

 

바울을 도와 에베소 교회를 굳건히 한 동역자들 중 하나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였다(딤전 1:3). 아굴라와 브루스길라 부부와 아볼로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했다.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참으로 컸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게 하여 하나님이 피로 사서 세운 그 교회를 지켜달라고 당부한 것이다(행 20:17-35). 나중 일이지만 사도 요한도 에베소 교회의 주교로서 사역한 일이 있다.

 

아시아의 관문임과 동시에 중심지였으되 온갖 범죄와 죄악이 난무하는 도시 에베소에 우뚝 선 에베소 교회에 전하는 말씀을 요한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다. 예수께서 일곱 별을 잡으신 것은 주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그가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땅 위의 모든 교회들을 관리하시며 돌보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서는 분쟁이나 갈등이 생길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나 계획을 성사시키려는 성도들이나 제직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교회에서는 예수님마저 그 곳을 떠나셔야 하는 슬픈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신 것은 하나님이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처럼 주님도 항상 그의 교회를 돌보시며 그의 뜻에 합당한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계심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찾아가셔서 지키고, 인도하며,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대원칙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교회는 반석위에 굳건히 서서 날로 성장하지만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을 하나님의 뜻 위에 두는 교회는 모래위에 세워진 집처럼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너의 행위와 수고를 안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정과 신령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교회를 위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도들만이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교회에 바치는 헌신과 충성과 봉사 그 자체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롬 12:1).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수고하는 성도들을 칭찬했으며(롬 16:12), 그 자신이 주를 위해 한 수고로 인해 기뻐하였고(고전 15:10), 모든 성도들에게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15:58)고 간곡하게 권면하였다.

 

예수께서도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셨다. 인내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되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생각난다. 소쩍새가 봄, 여름을 거쳐 가을 늦게까지 울어대는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한 송이 국화를 피어나게 할 수 있다면 보람된 인생의 열매를 맺으려면 얼마나 피를 말리는 인내심이 필요하겠는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감수해야 하는 인내는 선태의 여지가 없어 체념하고 기다리는 참음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찬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현재의 모진 고난을 참아내는 용감한 자만이 지낼 수 있는 인내심이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주의 일에 매진하는 진정한 인내심을 보였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마 5:11)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의 예수님을 위한 열심과 충성과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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