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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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7)-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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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을 하신 숨지시니라.”( 23:46)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징계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은 큰 구렁 위에 튼튼하고 안전한 다리를 놓으셨다. 우리는 그 구원의 다리를 통해 아담과 하와가 축출당한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인류구원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예수님은 아침 9시에 갈보리 언덕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에 오르셨다. 오후 3시에 운명하실 때까지 여섯 시간을 십자가에 달려계신 동안 예수님은 일곱 번에 걸쳐 말씀하셨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무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눅 23:33-34). 그리고는 옆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허락하셨다(눅 23:43). 그 후에 그의 십자가 밑에 서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요 19:26).

 

정오가 다가오면서 온 세상이 어두워지자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 외치셨다(마 27:46). 세 시간 후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면서 어둡던 세상이 밝아지자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며 영육간의 갈증을 토로하셨다(요 19:30).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그가 구원을 이루셨음을 선포하시고 운명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 기도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눅 23:46)

 

십자가에 달리셨던 여섯 시간 중 정오로부터 3시까지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셔야 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버리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어둠 속의 고통을 참기 힘들어 예수님은 어째서 그를 버리셨느냐고 아버지께 울부짖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절규에 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둠 속의 3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공의가 충족되자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다시 품안에 않으셨다. 캄캄하던 세상에 광명이 찾아 들었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다시금 아버지와 아들의 교통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에게 주어졌던 사명도 완료되었다.

 

사탄의 조종을 받는 악랄한 인간들이 그를 괴롭히고 모독하며 조롱할 수도 없게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임무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를 적대시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처럼 절망적이고 두려운 때는 없다. 정의의 하나님께서 그의 숨겨진 모든 죄악들을 낱낱이 들어내어 처벌하시기 때문이다. 19세기 청교도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성난 하나님 앞에 선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란 설교에서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구원 받은 자의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기쁨과 소망 속에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그들이 누릴 영광은 그네들이 온갖 불의와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당하는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아픈 고난에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질고와 슬픔을 담당하셨기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나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님께 그를 의탁하셨으니 하늘보좌에 앉으실 일만 남은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운명하시자 하나님은 3일 후에 그를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그리고는 40일 동안 세상에 머물게 하신 후 하늘보좌로 불러 올리시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11)

 

그 영광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낮고 천한 인간 아닌 세상을 통치하실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요 1:12)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면서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신 것은 예수께서 그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주장을 고집한 적이 없으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에 찬 기도를 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셨다.

 

그러나 그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최종 결정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들도 우리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맡겨야만 한다. 우리가 선정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싶고, 우리의 욕망을 이루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신뢰하면 그가 이루실 것이다.”(시 37:5)라 한 다윗의 기도를 우리들 자신을 위해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를 멸절 시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었던 유대교 신봉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로 다시 탄생한 후 그는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들려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같은 사도 바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 하신 기도는 그 자신만을 위한 간구는 아니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도 함께 받아 달라고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들이 들어가게 될 하늘나라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안전한 곳은 없다. 그 곳엔 완전한 조화와 질서가 확립되어 있으며, 그 누구도, 그 어떤 악한 세력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침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한 목자시며, 양의 문이신 예수님이 그의 양떼를 사면이 바위로 둘러 쌓인 우리에 집어넣고 문 앞을 지키시면 그를 넘지 않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 양들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구원 받은 성도들은 아무도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에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겐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며, 죽음의 골짜기에 던져 지더라도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그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처럼 두려운 것은 없다. 죽음은 그들에게는 모든 것의 끝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에게는 죽음은 영광스런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의 시작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라 말해준다.

 

태어난 집을 떠나지 않고 평생 그 곳에서 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땅에서 천년만년을 살겠다고 버틸 수는 없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이다.(히 9:27)

 

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들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그날이 와도 평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험하고 먼 인생의 나그네 길을 마치고 지금 가오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 기도하며 웃으며 떠나갈 수 있는 축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그가 흘린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받아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신 구세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그것이다.

 

또 있다. 죄악의 물결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생명 줄을 던져 그들에게도 구원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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