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ekim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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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6)-인간의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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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 외치시고,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슬픔과 고통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운명하시기 전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은 승리의 선언이었다.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승전 장군이 되신 것이다. 구세주로서의 사명이 끝나 천국 문이 활짝 열려 그를 구주로 맞아드리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의 오심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받은 온갖 핍박과 박해, 그가 사랑과 은혜를 베푼 사람들과 직접 선택하신 제자들에게까지 버림받고, 흉악한 강도들 사이에서 처형당하시며,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 것 등이 다 이루어졌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뿐이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약속된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자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세상을 정복할 위풍당당한 왕이었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초라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은 그에게 인간의 죄 짐을 지고 죽어야 할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오실 때는 구원 받은 성도들을 불러 모아 다스리실 하늘나라의 왕으로서 오시겠다고 분명히 밝히셨다.

 

영광 중에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들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루신 또 다른 하나는 구세주로서 그가 당해야 할 모든 슬픔과 고난을 이겨내신 것이다.

 

인간 예수님은 진정 “슬픔의 사나이”였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로부터 배척 받고, 배반당하는 쓰라린 아픔을 맛 보셨고, 사탄의 모략과 흉계의 대상이 되어 고통 당하시다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소년시절부터 그가 당해야 할 고난과 슬픔 그리고 올라야 할 십자가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사셨다. 홀만 헌트가 그린 “죽음의 그림자” 속의 예수님은 하루 일을 끝내고 목공소의 작은 창문으로 저녁 하늘을 내다보며 서 계신다. 피곤하면서도 황홀함이 깃들어 있는 얼굴로 두 팔을 쳐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작은 들창으로 들어오는 저녁 햇빛으로 그의 등 뒤의 벽에 그림자로 나타나 있다.

 

그 그림자는 십자가였다. 그 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망치와 굵은 쇠못들을 연상하게 하는 목공소 연장들이 널려져 있고. 예수님은 항상 무겁고 괴로운 십자가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사신 것이다. 하늘보좌를 떠나실 때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십자가를 향한 것임을 알고 계셨다.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난의 십자가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셨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려주자 그것이 그와 무슨 상관이냐며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라 하실 때 그의 마음에는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밤에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나도 들리겠다.”(요 3:14) 하신 말씀에서도 십자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좌우편에서 영광을 누리기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의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하신 때의 “잔”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고난의 잔을 의미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그늘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지내시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심한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셨기에 그 모든 고난이 끝난 것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음에 관한 모든 예언들이 이루어졌고, 그의 고난도 끝이 났다. 동시에 인간의 구원도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태양은 “빛과 열과 에너지” 세 가지 요소가 합하여 태양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도 이 같이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며 관할하신다. 성부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멸망의 길을 가는 인간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생명의 말씀으로서 인간에게 삶의 원칙을 가르치며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몫인 인류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걸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임무를 마치신 것이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가 해야 할 모든 것을 다 끝내셨음을 뜻한다는 사실은 “다 이루었다.”는 말의 유래와 뜻을 알게 되면 더욱 명백해진다.

 

그 말씀은 적을 격파하고 전쟁에서 이긴 왕들이 승리를 선언할 때 쓰던 표현이었다. 기원전 47년 줄리어스 시저는 폰투스 왕국의 파르니케스 2세를 소아시아의 젤라에서 물리치고 로마 원로원에 승전보를 보낸다. 그 승전보에 적힌 “왔다. 보았다. 이겼다.”의 “이겼다.”는 “다 이루었다.”의 직선적인 표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그가 사탄의 계교를 분쇄하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저의 승전보는 그 당시 내란 중이었던 로마에서 그의 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높이고, 그가 로마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 인물임을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저의 것에 비해 삼분의 일에 불과한 짧은 예수님의 승전보는 전 인류를 향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전보였다.

 

예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쟁취한 이 같은 승리는 그가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탄의 의도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승리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낫고 천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불치의 병자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시며,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신 것은 멸망할 인간들에게 영생을 허락하기 위함이었다.

 

그 막중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인 십자가에 달리셔서 예수님은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임무를 완벽하게 마치신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드리는 것뿐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롬 6:23)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귀중한 구원의 진리를 믿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 무엇을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힘과 능력과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로마 교황의 구원론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외치며(Only Scriptures, Only Grace, Only Faith),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려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탕한 생활에 빠져있던 한 청년이 성령의 감동으로 죄의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단하고 때마침 부흥집회를 하고 있던 교회를 찾아갔다. 그가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집회는 이미 끝나 있었고, 목사님과 제직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술에 취해있던 그는 목사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다. “목사님, 저도 지금부터는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늦었네, 젊은이. 너무 늦었단 말이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청년은 놀라서 다시 물었다. “늦었다니요. 집회가 끝나서 제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말입니까?” 목사님이 대답했다. “그래, 자네는 너무 늦었어.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자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일을 다 해주셨거든.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자네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지불해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 외에는.”

 

이 간단한 예화를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며, 주께 충성하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심으로 죄악의 물결에 떠내려가던 사람들을 구원할 “구원의 방주”가 완성되었다고 선포하셨다. 그 옛날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노아 부부와 그의 세 아들 부부 등 여덟 명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건조하신 구원의 방주에는 그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승선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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